국내 각계 전문가들이 삼성전자의 대내외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삼성의 존립과 중장기적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총수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기업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정부의 규제 완화도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은 주력인 반도체 사업에서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사업에서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SK하이닉스가 기술력을 바짝 뒤쫓고 있다. 칩 위탁생산(파운드리) 사업에서는 TSMC·인텔 등 내로라하는 반도체 기업들이 첨단 기술로 칩 설계 회사를 유혹하고 있다. 삼성의 분위기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가석방 이후 11월을 마지막으로 주요 사업 파트너가 몰린 미국을 찾지 못하고 있다. 취업 제한, 재판 일정 소화로 경영 일선에 나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형기 종료일인 올해 7월까지 거주지가 제한되고 해외 출국 시 법무부 감찰관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 등 전문 경영인들이 해외 출장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오너의 부재 속에서 각종 악재와 굵직한 의사 결정에 쉽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24일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서울경제와의 통화에서 이 부회장 사면 이슈에 대해 “지금의 삼성은 긴 호흡을 갖고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라며 “전문 경영인들이 회사를 운영해도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신사업 분야 진출 등 장기 전략을 결정할 때는 오너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오너 부재가 인수합병(M&A)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삼성은 2016년 자동차용 오디오 기업 하만을 인수한 뒤 굵직한 M&A 사례가 없다. 전문가들은 “모든 사업을 삼성그룹 혼자서만 해낼 수 없다”고 입을 모으면서 최종 의사 결정권자가 있어야 삼성이 M&A와 신사업 진출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경쟁사들은 M&A와 미래 사업 준비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에 이어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자산(IP) 기업인 암(ARM) 인수도 검토하고 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삼성은 이 부회장의 사법리스크로 적극적으로 M&A를 추진하는 경쟁사들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기업 총수가 회사 운명의 90%를 좌우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오너의 존재감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 부회장의 부재는 한국 경제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공급망 마비, 글로벌 금융 시장에 드리운 인플레이션 등 대외적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때와 비교하면 부동산, 가계부채, 인플레이션, 무역 의존도 등 각종 경제지표 상황이 훨씬 악화됐다”고 꼬집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이 부회장을 포함한 주요 기업 경영인들이 글로벌 시장을 마음껏 누빌 수 있도록 사법 리스크 완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삼성전자를 포함한 국내 대기업들이 ‘민간 주도 성장’ 흐름에 맞춰갈 수 있도록 규제 완화와 기업 친화적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부회장이 사면되면 리더십을 발휘해 대기업 투자와 고용을 견인할 수 있는 만큼 문재인 정부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주문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영인들이 각종 사법 리스크와 상속세·법인세 등 재계를 옥죄는 규제들에서 벗어나 신바람이 날 수 있도록 정부가 밑받침을 해줘야 한다”며 “정부가 규제 완화에 소극적으로 대응할수록 공급망·고금리 등 복잡한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밝혔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3월부터 시행한 중대재해처벌법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조항들이 많고, 국회에서는 하루에 181개의 법안이 쏟아져 나온다”며 “이러한 규제를 화끈하게 풀어주는 등 확실한 규제 개혁과 함께 지나친 입법을 막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경 펠로들은 삼성 특유의 오너 중심 경영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정치권의 인식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너를 중심으로 삼성의 중장기 전략과 계열사 간 시너지를 모색했던 ‘미래전략실’은 2017년 국정 농단 이후 해체됐다. 이 조직은 최근 사업 지원 태스크포스(TF) 등 3개 분야 소규모 TF 형태로 쪼개져 운영되고 있지만 그룹의 ‘중추’가 없다 보니 초거대 기업 운영에 혼선이 발생한다는 것이 재계의 중론이다.
홍 교수는 “삼성이 가진 독특한 의사 결정 구조의 장점은 살리지 못하고 컨트롤타워를 갖고 있는 것 자체를 잘못으로 보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융합이 필수 가치가 된 최근 시장 환경에서 계열사 간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시장이 삼성을 바라보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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