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쾌히 합의됐다.”
지난 15일 대통령실이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가진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미국·캐나다 순방 사전 브리핑에서 한미와 한일 정상회담을 표현한 말이다. “한미 정상회담과 한일 정상회담은 하기로 합의해놓고 시간을 조율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서로 이번에 만나는 것이 좋겠다”며 일본측이 ‘흔쾌히’ 나섰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일은 브리핑과 달랐다. 한미 정상회담은 사실상 취소됐고 한일정상회담은 일본에 끌려다니며 만난 꼴이 됐다. 이를 두고 더불어민주당은 ‘빈손·굴욕’ 외교라며 비판하고 있다. 외교안보실의 성급한 발표가 순방을 망쳤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엘리자베스 2세 국장에 바뀐 정상들 스케쥴
美 바이든도 英 찾으며 스케쥴 줄줄이 변경
섣불리 한미 정상회담 발표 했다가 무산돼
美 바이든도 英 찾으며 스케쥴 줄줄이 변경
섣불리 한미 정상회담 발표 했다가 무산돼
윤 대통령은 지난 18일 영국·미국·캐나다 5박7일 순방에 돌입했다. 국민들의 기대감은 높았다. 당초 이번 순방의 주요 일정은 20일~2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 연설이었다. 유엔은 회원국만 193개다. 당연히 회원국이 32개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A·나토)보다 각국 정상들이 양자회담 스케줄을 잡기 어려운 구조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한미와 한일 정상회담이 합의됐다고 밝혔다.
이때문에 윤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내놓을 성과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원달러환율이 1400원 위로 치솟고, 미국이 인플레이션방지법(IRA)을 통해 한국산 전기차에 대한 차별하는 조치가 우리 기업을 옥죄는 상황이었다. 윤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해법에 대해 국민들과 기업들의 눈이 집중됐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영국을 거쳐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계획이 변경됐다. 현지시간으로 20일 뉴욕에서 열리는 제77차 유엔총회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연설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돌연 바이든은 그날 국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예정에 없던 고(故)엘리자베스 2세 여왕 국장에 참석하면서 모든 일정이 조정된 것이다. 당연히 “합의됐다”던 한미 정상회담 역시 불투명해졌다. 결국 이번 순방에서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았고 ‘48초 환담’으로 한미 정상의 짧은 만남이 끝났다. 이마저도 윤 대통령이 일정을 바꿔 바이든 대통령이 있는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에 찾아가면서 성사된 만남이다.
‘흔쾌히’ 열린다던 한일정상회담 무산 소동
한일 “공동발표 관례 깼다” 현장에서 반성문
尹 대통령, 기시다 찾아가는 모양새 연출돼
한일 “공동발표 관례 깼다” 현장에서 반성문
尹 대통령, 기시다 찾아가는 모양새 연출돼
더 큰 사고는 한일 정상회담이라는 말도 나온다. 대통령실은 “흔쾌히 합의됐다”는 한일 회담을 두고 현지에서 말을 바꿨다. 순방에 동행한 취재진에게까지 일정을 함구했다. 심지어 회담 직전까지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사실 한일 정상회담은 순방을 떠나기 전부터 무산될 것이라는 말이 오갔다.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한일 정상회담 발표에 일본 측이 공개적으로 반발했기 때문이다. 기시다 총리가 일본 언론에 “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럼에도 뉴욕 취재 현장에서 21일 오후 12시 30분께 한일 정상이 만난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대통령실은 공식적으로는 확인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돌연 당일 12시 23분께 윤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국무총리가 뉴욕 모처에서 만났다는 공지가 날아들었다. 통상 순방일정에는 극비를 요구하는 일정을 제외하면 동행한 순방 취재단이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신원조회를 거치고 비용까지 부담해가며 대통령의 일정을 공개적으로 취재한다. 하지만 현장에는 일본 취재진만 있었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는 윤 대통령이 자국 취재진도 없이 일본측을 찾아가서 만난 것이다. 30분의 회담 역시 우리 정부는 정상회담이라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간담이라고 밝혔다. 심지어 회담장에는 양국 국기조차 없었다.
미스테리한 한일 정상회담의 막전막후는 대통령실 고위관계자의 현지 비공식 브리핑에서 윤곽이 드러났다. 이 관계자는 “한일 회담과 관련해 정상회담 합의 과정이 관례에 따르면 동시 발표가 일종의 관례”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데 그것이 어떤 시점에 제대로 지켜지지 못한 측면이 있어 양측간 이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정상회담은 양국이 공동발표하는 관례를 우리가 깨면서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현장에 일본 언론만 있었던 배경도 나왔다. 고위관계자는 “궁극적으로 일본 측과 합의를 한 것은 소위 회담을 하기까지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합의했었다”고 말했다. 일본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한국 언론에는 알리지 않았다는 말로도 해석이 될 수 있다.
11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 19일 예고
나흘 뒤인 15일 한미·한일 회담 확정했다 사달
섣부른 성과주의에 한미일 외교 큰 짐 떠안아
나흘 뒤인 15일 한미·한일 회담 확정했다 사달
섣부른 성과주의에 한미일 외교 큰 짐 떠안아
순방이 끝나자 성급하게 한미·한일 정상회담을 예고한 외교안보라인에 대한 질책이 터져나왔다. 애초부터 한미, 한일 정상회담은 변동성이 큰 상황이었는데 성급하게 확정 일정으로 발표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지난 8일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국장은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19일에 열기로 11일께 예고됐다. 윤 대통령은 물론 바이든 대통령도 참석을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의 영국행으로 외교 일정이 변경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나흘 전인 15일에 “한미 정상회담이 합의됐다"고 발표하며 기대감만 키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48초에 그친 환담이라는 실망으로 돌아왔다.
한일 정상회담 역시 양국이 공동으로 발표하는 관례를 우리가 ‘흔쾌히’ 깨면서 일본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모습이 연출됐다. 나아가 일본으로선 마치 안 해도 될 정상회담을 해준 것이 됐다. 일본 언론에서는 “당연히 다음에는 (한국 측이) 성과나 진전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번에 자신들이 양보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일본은 강제징용을 비롯한 과거사 문제에서 더욱 고자세로 나올 상황이다.
야당은 반발하고 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순방 총책임자인 박 장관을 해임하고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대통령실 김은혜 홍보수석 등 외교안보 참사 트로이카의 전면 교체를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오늘(26일)까지 결단 내리지 않으면 민주당은 27일 박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발의하겠다"라고 예고했다.
대통령실과 여권에서도 외교안보라인이 섣불리 성과를 강조하다가 국민에게 실망만 안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흔쾌히'라는 단어는 정말로 큰 실수"라며 “이 단어에는 한일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상당한 외교적 이견을 좁혔고, 한일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양국 관계가 전환점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한미 정상회담은 엘리자베스 여왕 국장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을 감안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尹 대통령, 외교안보라인 경질론 일축
“한일, 한번에 한 술에 배부를 관계 아냐"
한미도 “바이든 대통령과 현안 컨펌해”
“한일, 한번에 한 술에 배부를 관계 아냐"
한미도 “바이든 대통령과 현안 컨펌해”
그럼에도 윤 대통령이 민주당에서 요구하는 외교안보라인 인적쇄신을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라는 외교적 악조건 속에서도 한미, 한일 정상을 마주해 현안을 나누는 성과가 있었다는 게 대통령실의 판단이다. 윤 대통령 역시 이날 오전 취재진을 만나 “미국 대통령하고 장시간을 (회동 시간을)잡기도 어려울 것 같고 무리하게 추진하지 마라(라고 지시했다)”면서 “그 대신 (IRA 등의 문제는 장관 등 실무진에서 논의하고)바이든 대통령과는 최종 컨펌(확인)만 하기로 하자”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일 정상회담 역시 “한일 관계는 한번에 한 술에 배부를 수 있는 관계는 아니다”라며 “지난 정부에서 한일관계가 너무 관계가 많이 퇴조했고, 일본 내 여론도 있고 우리 국민들의 여론도 있고 양국 국민들의 생각을 잘 살펴가면서 무리 없이 관계 정상화를 해야하고(중략) 앞으로 어떤 어려움 있다고 하더라도 한일 관계의 정상화는 강력하게 추진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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