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저온과 가뭄으로 대파 생육이 나빠져 가격이 예년 대비 1.5배 상승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리며, 품질은 유지하겠습니다.”
일본 할인슈퍼마켓 ‘오케이’는 제품마다 가격 산정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둔다. 이 ‘정직카드’로 고객의 믿음을 산 오케이는 지난해 매출이 12.7% 상승했다.
물가는 오르고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는 유통업계 위기지만 장기간 저성장을 겪은 일본의 혁신 사례를 통해 극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대한상공회의소는 15일 '불황을 이겨낸 일본 혁신 유통기업의 대응 사례와 시사점' 연구 보고서에서 일본 유통기업들이 많이 파는 것보다 필요한 것을 찾는 경험, 낮은 가격보다 납득할 수 있는 가격, 외주 생산보다 스스로 만들고 공급하는 구조 등으로 위기 속에서도 고성장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상의는 대표 사례로 DIY(Do It Yourself·직접 만들기) 용품 전문점인 '한즈만'을 꼽았다. 한즈만은 '선택지를 줄여야 고객이 편하다'는 유통 상식을 깨고 매장에 20만개가 훌쩍 넘는 압도적인 상품 다양성을 확보했다. 목공과 전기, 정원, 배관 등 각 카테고리마다 ‘세분화에 세분화’를 거듭해 나사 종류만 1만 가지에 달한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지난해(2024년7월∼2025년3월) 매출액과 내점 객수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01%, 103% 증가했다.
일본 프리미엄 식료품 유통업체 '키타노 에이스'는 단일 점포에 500종 이상의 카레와 100종 이상의 샐러드 드레싱을 진열하는 등 '식문화를 탐험하는 셀렉트 숍'으로 진화하며 특정 소비층의 강한 충성도를 확보했다.
박경도 한국유통학회 회장(서강대 경영학 교수)은 "한국 유통은 팔리는 상품에 지나치게 집중해 세부적 니즈와 욕구를 놓치는 경우가 있어 아쉽다"면서 "고객이 '이건 나를 위한 제품'이라고 느끼는 감동은 가격 경쟁력보다 훨씬 강력한 충성도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가격 인상 이유와 품질 상태 등을 설명한 정직 카드 시스템을 도입해 고객과 신뢰를 구축한 할인슈퍼마켓 '오케이', 기획·제조·물류·매장·소비자 피드백까지 하나로 연결된 전방위 수직 통합형 운영 모델로 소비자 수요에 신속히 대응한 유니클로, 교무슈퍼 등의 사례도 소개됐다.
특히 유니클로는 '우리는 정보로 옷을 짓는 회사다'라는 모토 아래 전 부서를 통합하고 부서 간 실시간 데이터를 공유하는 '팔리는 순간 생산이 시작되는 시스템(정보제조 소매업)' 혁신을 이뤘다. 그 결과 모회사 패트스리테일링의 지난해(2023년9월∼2024년8월) 매출과 영업이익은 2020년 동기 대비 각각 54.5%, 23.5% 증가하며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장근무 대한상의 유통물류진흥원장은 "일본 유통업계는 정반대 전략으로 불황을 기회로 바꿨다"며 "한국도 단기적인 가격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강점을 구축하고, 고객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방향으로의 근본적 체질 개선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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