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진 미국 카네기멜런대 로봇공학과 교수는 1년여 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도움을 청하는 연락을 받았다. 오 교수를 간절히 찾은 곳은 ‘신들의 바다 정원’이라고 불리는 남태평양의 청정 휴양지 팔라우. 오 교수가 개발한 인공지능(AI) 로봇 페인팅 시스템인 ‘프리다(FRIDA)’를 활용해 현지 전통 나무공예 장인들을 도와줬으면 한다는 요청이었다. 오랜 시간 숙련이 필요한 수공예지만 현지 젊은 세대들이 더 이상 전수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첨단기술을 예술에 접목한 프리다를 전통 예술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으로 생각한 것이다. 오 교수는 팔라우의 고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기술적·재정적 협업을 통한 지원 방안을 현재 찾고 있다.
오 교수가 개발한 화가 로봇 프리다는 중의적 이름이다.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이름인 동시에 ‘예술 발전을 위한 프레임워크 및 로봇공학 이니셔티브(Framework and Robotics Initiative for Developing Arts)’의 약자다. 프리다가 품은 의미와 명성처럼 수천 ㎞ 떨어진 남태평양 섬나라에서 문을 두드릴 정도로 프리다의 기술은 인간의 영역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동안 그림을 그리는 로봇이 여러 차례 개발되기는 했지만 대부분 인간처럼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주어진 이미지를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단순히 재현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 교수가 개발한 프리다는 AI 융합을 통해 인간의 언어로 설명을 듣고 그에 맞는 예술 작품을 생성해낸다.
예를 들어 최근 유행하고 있는 챗GPT의 ‘지브리풍’ 사진 변환이 디스플레이상에서만 구현되는 것과 달리 프리다는 지브리풍 그림을 직접 캔버스에 그려낸다. 여기에 단순 변환된 모습을 그리는 게 아니라 로봇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는 붓놀림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학습하면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프린팅이 아닌 ‘창작’이 더해진 페인팅이라는 차별성으로 프리다는 다른 로봇과 궤를 달리한다.
오 교수는 “로봇이 스스로 생각하고 혼자 그림을 그리는 프리다를 접한 후 새로운 기술에 열린 자세를 가진 예술가들이 함께 작업하기를 많이 원한다”며 “프리다는 인간의 설명대로 그리거나 만드는 작업을 실제 환경에서 하는 로보틱스 프로젝트다. 프리다의 작업 자체가 창작”이라고 말했다.
현재 프리다는 시뮬레이션으로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운 물질인 붓과 물감에 대한 인지를 여러가지 기술 개발을 통해 극복해나가고 있다. 현재 오 교수는 프리다가 페인팅을 넘어 점토로 도자기를 만들거나 조각을 빚어내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조각을 만들고 도자기를 빚는다는 것은 로봇 기술 발전 중 가장 어려운 ‘손 기술(dexterity)’의 발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프리다의 작업을 창작이라고 정의했지만 아직 예술의 가치에 도달한 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오 교수는 “로봇이 AI와 융합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혼자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로봇 연구자로서 이러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추구하지도 않는 방향”이라고 했다. 이어 “예술이란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넘어 예술가가 전하는 메시지로, 사람의 담론이고 사람 간의 소통”이라며 “AI나 기계도 메시지를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기계가 주는 메시지는 아직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프리다를 통해 예술과 기술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결국 로봇의 역할은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인간을 돕기 위해 협업할 수 있는 도구라는 게 오 교수의 관점이다.
그는 “프리다는 팔라우의 전통 목공예나 한국의 전통 자개처럼 사라져가는 분야를 되살리고 이를 통해 실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을 돕는 기술”이라고 부연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로봇이 사람과 상호작용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아직 많은 기술적 도전이 남아 있다고 봤다. 특히 로보틱스 분야의 기술적 과제를 데이터를 통해 얼마나 빠르게 풀 수 있는지가 업계의 큰 화두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두 가지 포맷의 데이터로 정리할 수 있는 언어나 이미지 분야의 급격한 성장은 데이터가 늘어나면서 가능해지고 있다”며 “하지만 로봇의 학습을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데이터가 적합한지조차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 상황이고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는 있지만 각기 다른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다양한 물질과 물체들의 물성을 재현할 수 있는 시물레이션 기술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에 맞는 데이터를 현실에서 모으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로봇의 손과 관련된 연구는 아직 더 많은 발전이 필요한 분야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휴머노이드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다양한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로봇팔 등 로봇의 핵심이 되는 부분에 연구 개발이 집중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휴머노이드는 최근 10년간 가장 어려웠던 문제 중 하나인 보행 부분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휴머노이드는 디자인과 상관없이 왔다갔다하는 보행 기술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세밀한 수작업(manipulation)을 위한 로봇의 손 디자인 및 손 기술이 로봇의 혁신을 이끌 다음 요소”라고 했다.
로봇에 대해 개척해야 할 분야가 많이 남은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첨단기술로 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뛰어난 인재들이 많은 한국도 로봇 분야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 오 교수의 생각이다. 다만 역량에 비해 기대만큼 기술 개발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 방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봤다.
오 교수는 “정부의 지원 및 투자는 어느 정도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맞지만 지나치게 유행을 따르는 경향은 새로운 시도, 즉 ‘유행의 창출’을 어렵게 한다”며 “또 논문 숫자 등 점수에 초점이 맞춰진 정량 평가는 점차적이고 보수적인 연구에 맞는 평가 방식으로, 리스크를 안고 혁신적인 생각과 방향을 추구하는 연구에 대한 지원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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