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찾은 울산 동구 HD현대일렉트릭(267260) 500㎸(킬로볼트) 변압기 공장. 총조립장 안에는 최종 조립 단계에 들어선 초고압 변압기 10여 대가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변압기는 용량과 기능에 따라 크기가 달랐지만 큰 것은 40피트 컨테이너(약 12.2m×2.4m×2.6m)와 맞먹는 거대한 규모였다. 작업자들은 변압기에 올라 절연 성능을 확인하고 기계적 조립의 완결성을 점검하는 등 마무리 작업에 분주했다.
울산조선소 한 편에 자리 잡은 변압기 공장은 1977년 출범한 현대중공업 중전기사업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처음에는 자체 건조 선박과 현대건설의 일부 플랜트에 들어갈 변압기와 발전기·전동기 등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사업은 전력 산업의 성장과 함께 팽창했다. 발전소에서 최종 소비군까지 전력 공급 밸류체인 전 단계의 제품과 솔루션을 제공하는 수준으로 성장했고 2017년 HD현대일렉트릭이라는 독립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이날 공장 집무실에서 만난 김영기 HD현대일렉트릭 대표는 “회사의 납기 준수율이 경쟁사들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좋다”면서 “품질을 높이고, 불량률을 낮추고, 수주 이익률을 높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1993년 현대중공업으로 입사해 33년째 일하고 있는 ‘현대맨’이다.
HD현대일렉트릭 독립과 함께 회사를 옮겨 지난해 11월 지휘봉까지 잡게 됐다. HD현대일렉트릭의 사업은 크게 고압 변압기·차단기 등을 생산하는 전력기기 부문, 배전반과 저압 차단기 등을 생산하는 배전기기 부문, 산업용 모터 등을 생산하는 회전기기 부문으로 나뉘는데 김 대표는 전력기기와 회전기기 부문장을 거쳤다.
회사는 최근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산업 열풍에 따른 전 세계적인 전력 수요 증가와 북미·유럽 지역 전력망 노후화로 초고압 변압기 등 전력기기 시장이 슈퍼사이클(초호황기)에 들어섰다는 평가다. 김 대표는 “올해 매출 목표인 3조 8918억 원을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 것 보인다”며 “최소 3년간은 안정적인 실적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2021년 1조 8060억 원을 시작으로 2022년 2조 1045억 원, 지난해 3조 3223억 원으로 매출 규모를 꾸준히 키워왔는데 수주 잔액 등을 고려했을 때 이 같은 상승세가 적어도 3년은 지속된다는 얘기다.
김 대표는 “제조업에서 영업이익률 20%를 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수익성 역시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회사는 2021년 97억 원에서 2022년 1330억 원, 2023년 3152억 원, 지난해 6690억 원으로 영업이익이 성장했다. 영업이익률 20%를 유지하면 올해 7500억 원에 이어 2028년에는 ‘1조 원 클럽’ 가입이 가능해지는 결과가 나온다.
김 대표는 지속 성장의 비결을 공격적인 투자로 돌렸다. 그는 “HD현대중공업(329180)으로부터 막 독립했을 때 전력기기 시장의 불황 여파로 2018~2019년 무려 2500억 원의 적자가 났다”면서도 “희망퇴직 등 구조조정을 하던 어려운 시기에도 시장이 성장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미국 앨라배마와 울산의 초고압 변압기 공장을 증설하기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다른 경쟁사들이 시설 투자를 하지 않을 때 생산 능력(캐파)을 늘려놨고 다시 호황이 왔을 때 시장의 물량을 끌어 올 수 있었다”며 “2011년 일찍이 미국 앨라배마주에 변압기 공장을 지어 세계시장에 진출했기 때문에 트렌드를 읽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국내 거점인 울산 변압기 생산 시설은 현재 규모를 키워 500㎸ 공장을 비롯해 300㎸ 공장, 400㎸ 공장, 800㎸ 공장까지 총 4개 공장으로 이뤄져 있다. 세계 최초로 변압기에 들어가는 핵심 구성품인 철심을 자동 구성하는 ‘철심자동적층설비’를 도입하고 설비와 공정 관리, 생산 현황 등을 실시간 모니터링할 수 있는 ‘생산운영시스템(MES)’을 구축해 품질과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고객으로부터 발주를 받아 제품을 최종 인도하기까지 약 11개월이 걸리는데 울산공장에서만 하루 1대 꼴로 변압기를 출고해낸다. 제품은 북미와 유럽·중동 등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은 특히 미국 초고압 변압기 시장에서 점유율 1위(약 15%)를 달리고 있다. 다음 캐시카우로는 배전기기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김 대표는 “화력발전에서 신재생에너지로 에너지 전환이 일어나면서 변압기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며 “이런 변화로 더 많은 에너지를 전기로 쓰게 됐고 이제는 전력기기만큼 배전기기가 많이 필요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AI 데이터센터 등 막대한 전력 수요가 필요한 시설이 늘고 있지만 아직 배전기기 확대 추세는 시작도 안 했다”며 “현재 매출 기준으로 전력기기 부문이 60%, 배전기기 및 회전기기 부문이 40%를 차지하는데 배전 제품 매출을 늘려 50대50 수준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HD현대 권오갑 회장과 정기선 수석부회장이 김 대표에게 주문한 것도 배전기기 사업의 성장이라고 한다. 김 대표는 “전력기기만큼 배전기기 경쟁력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달라는 당부가 있었다”며 “전력기기 수익의 80~90%를 해외에서 올리고 있는 만큼 배전 제품도 해외시장을 중심으로 개척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글로벌 배전기기 시장은 프랑스의 슈나이더일렉트릭, 독일의 지멘스, 일본의 히타치·미쓰비시 등 굵직한 전력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HD현대일렉트릭은 전력 공급 전 과정을 포괄하는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어 생산 기반이 갖춰져 있고 신속한 방향 전환도 가능하다. 이미 수요 대응을 위해 10월 완공을 목표로 충북 청주에 새 배전기기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내년이면 생산 능력을 풀가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 대표는 “회전기기 부문도 새 성장 동력으로 키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탄소 중립의 영향으로 엔진보다 모터 수요가 늘면서 회전기기 시장도 점차 성장하고 있다”며 “석유 시추도 모터를 통해서 하는 방식이 늘고 있고 탄소포집·활용·저장(CCUS) 기술에도 많은 모터가 쓰인다”고 설명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국내 회전기기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김 대표는 “새 정부에서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회전기기 사업과 관련해 많은 연구개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에너지저장장치(ESS)도 올해를 해외시장 진출의 원년으로 삼고 북미·유럽·아시아 등 글로벌 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적으로는 특히 성장 가능성이 높은 유럽 시장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김 대표는 “유럽은 녹색 에너지 전환, 노후 전력망 교체, 데이터센터 시장 확대 등 요인에 힘입어 전력 인프라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핵심 시장”이라며 “고객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지난해 말 독일에 법인을 신설했고 최근 스코틀랜드 전력회사 ‘에스피에너지네트웍스’와 400㎸급 초고압 변압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등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해 유럽에서 4억 3775만 달러(약 6070억 원) 규모의 수주 실적을 기록했는데 이는 2020년 이후 연평균 44%에 달하는 높은 성장세다. 김 대표는 “헝가리와 스위스에 위치한 현지 연구소를 중심으로 친환경·고부가가치 제품 라인업을 확대하고 현지 맞춤형 기술 지원 체계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김 대표의 등 뒤에 걸린 액자가 겹쳐 보였다.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한 마음은 당신을 굳세고 바르고 총명하게 만들 것입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친필 어록이었다. 김 대표는 “현대 정신을 잘 담은 문구”라며 “HD현대그룹의 웬만한 사무실에는 다 걸려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초심을 잃지 말자는 마음으로, 어려울 때 위축되지 말자는 마음으로 대표실에 오면서 직접 액자를 걸었다고 한다.
김 대표에게 CEO로서의 목표를 묻자 “10년 뒤에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하려면 바로 앞에 있는 이익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된다”며 “지금은 회사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견고한 체력을 마련할 중요한 시기”라고 했다. 김 대표는 “구성원 모두가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면서 “단순한 실적 달성이나 외형 성장에만 매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966년 서울 △1990년 경희대 공학사 △1993년 텍사스 A&M대 공학석사 △1993년 현대중공업 입사 △2011년 현대중공업 중국연구법인장 △2016년 현대중공업·현대일렉트릭 고압차단기 담당임원 △2019년 현대일렉트릭 전력기기부문장 겸 R&D부문장 △2020년 현대일렉트릭 전력사업본부장 △2025년 HD현대일렉트릭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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