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관세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제조업 재건에 투입할 수 있는 대규모 투자 펀드 조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관세 협상의 물꼬를 트기 위해 제안한 ‘한미 제조업 르네상스 파트너십’이 자칫 정부 주도 대미 투자 확대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국내 주요 대기업들 모두 조 바이든 정부 당시 상당한 규모의 대미 투자를 진행해 추가 투자금 마련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16일 정부 관계자 등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이달 초 미국 워싱턴DC에서 진행된 한미 관세 협상에서 이같은 내용의 대미 투자 펀드 조성 방안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이 미국에 제안한 내용을 거론하며 한국에도 이에 준하는 규모의 투자를 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일본이 미국에 제안한 펀드 규모는 4000억 달러(약 554조 4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3개월치 명목 국내총생산(GDP)에 해당하는 돈을 ‘협상 청구서’로 내민 셈이다.
제조업 르네상스 파트너십에 한국이 얼마를 투입할지를 두고 한미 양측은 협상 막판까지 힘겨루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한미 양측 모두 제조업 협력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어 투자 규모를 구체화하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협상국들의 시장을 개방하려 하고 있다. 한국은 그렇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한국과의 협상이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시사했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협상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기업들이 그동안 대미 투자를 많이 고민해왔고 이번 협상을 계기로 함께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한국에 4000억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 투자 여력이 없다는 점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4000억 달러는 비현실적인 규모”라며 “반도체나 2차전지의 경우 이미 바이든 정부 시절 상당한 규모의 설비투자가 진행돼 더 이상 여력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 기업의 대미 해외직접투자(FDI)는 2020년 152억 달러에서 지난해 223억 달러로 50% 가까이 뛰었다. 2023년 기준으로는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최대 투자국이 되기도 했다.
한국 기업들의 굵직한 투자 발표도 나올 만큼 나왔다는 평가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3월 말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총 21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대한항공은 2033년까지 미국 보잉사의 항공기 50대를 도입하고 GE에어로스페이스의 엔진을 구입하는 데 약 327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요구에 맞춰 한국 기업들의 설비투자를 미국으로 유도할 경우 한국 제조업 역량이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항구 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과 제조업 협력을 할 수 있는 기업들은 결국 글로별 경쟁력이 있는 소수 대기업”이라며 “이들의 공장이 미국으로 가면 우리나라 산업이 상당한 구조조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자동차·조선같이 전후방 효과가 큰 산업은 핵심 공장이 이전하면 제조업 공동화가 발생해 경제 전체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의미다. 이 연구위원은 “미국도 자동차 산업이 어려워지면서 제조업이 무너졌다”며 “대외 투자 확대는 신중히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염명배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도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정부가 기업의 경영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있어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숫자 자체에 매몰되기보다 유의미한 협상 결과를 얻어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상식에 벗어난 요구를 일단 지르고 보는 것은 잘 알려진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방식”이라며 “펀드 규모를 거론했다는 것은 정부의 제조업 르네상스 카드가 마음에 들었다는 방증”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 선전에 활용할 수 있는 숫자를 만들어 명분을 주고 구체적인 금액은 협정문에서 빼는 방식으로 협상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기존 투자액을 포함하고 중장기 투자 전망치를 더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원하는 숫자를 맞춰주는 대신 품목 관세 등에서 대폭 양보를 얻어내면 한국으로서는 나쁠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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