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의 작물 과학자들은 전 세계를 돌며 작물 씨앗을 수집해 북극의 저장고로
보내고 있다. 이 저장고는 재난이 닥쳤을 때 최후의 선택이 될 것이다.
신(新) 노아의 방주인 셈이다.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숄라 시장. 북새통을 이룬 노점을 보면 인류의 식량공급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어렵다.
말린 칠리 후추가 잔뜩 든 커다란 자루가 감자, 무, 당근, 양파, 토마토 같은 야채 더미 위에 쌓여있다.
양념 재료를 파는 노점에 화려하게 쌓여 있는 커민, 심황, 생강에서 나는 냄새는 손님들을 유혹한다.
루이지 주아리노는 시장의 흙길을 돌아다니며 허리를 굽혀 유향 냄새를 맡기도 하고, 한 줌의 콩 꼬투리를 쥐어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냥 콩이 든 자루로 보일 뿐이지만, 이 48세의 작물 과학자에게는 콩 자루 하나하나가 전 세계적인 기아를 막을 완충장치로 보인다.
주아리노는 조심스럽게 말린 씨앗을 만졌다.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연약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오지에서 보냈다. 인류 사회를 지탱해주는 작물 종의 다양성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다.
일 때문에 오만의 길 없는 산촌마을에 간 적이 있고, 알제리와 나이지리아 사이의 황량한 사하라 사막을 건넌 적도 있다.
독특한 특징을 가진 작물 종을 찾아다니는 그의 작업은 언젠가 지구의 농업과 지구인들을 병충해와 가뭄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주아리노는 특정 국가의 산업발전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물들이 멸종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작물 수집 문제로 얘기가 옮겨가자 그는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콩알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의 기동성은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디라도 사람이 가지 못하는 곳이 없지요. 하지만 가뭄 같은 것에는 더욱 취약해졌습니다. 인구가 증가할수록 그만큼 많은 경지가 도시로 바뀌고, 적은 땅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현대 농업이 효율을 명분으로 작물을 유전적으로 다 동일하게 만들어 버린 탓에 우리 인류가 수 천 년을 의존해왔던 작물들은 점점 더 약해져가고 있다.
작물 종의 다양성은 충분하지 못하다. 작물들도 살아남으려면 야생식물들과 마찬가지로 종의 다양성이 확보돼야 한다.
하지만 작물 종의 다양성은 현재 위태로운 상태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년 동안 작물 종 가운데 75%가 멸종했다. 이대로 간다면 재난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노르웨이 정부는 올 2월 본토에서 960km 떨어진, 찬바람이 씽씽 부는 북극해의 군도에 거대한 요새인 스발바드(Svalbard) 작물 씨앗 저장고를 개장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주아리노가 과학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국제작물다양성신탁(Global Crop Diversity Trust, 이하 작물신탁)’도 참여한다.
작물신탁의 목표는 농업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물신탁은 2억6,000만 달러의 기금을 모을 계획이며, 그 중 1억3,000만 달러는 이미 확보된 상태다.
작물신탁은 전 세계에 필수적인 작물의 씨앗과 유전자은행을 영원히 보존한다는 계획이다. 스발바드 저장고는 모든 것이 다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한 최후의 보루, 즉 신(新) 노아의 방주인 셈이다.
사암으로 이루어진 산을 약 120m나 파고들어가 만들어진 이 스발바드 저장고의 내부 온도는 외부의 영구 동토층 온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곳은 해면으로부터 130m 아래에 있으며, 북극의 모든 얼음이 녹아도 침수되지 않는다.
터널은 철제문이 여러 겹으로 설치돼 있고, 고성능의 비디오 감시체계를 통과해야 450만 가지의 중요한 작물 씨앗을 모아놓은 3개의 방에 도달할 수 있다.
핵전쟁, 테러공격, 자연재해, 심지어는 지구온난화로부터 안전한 스발바드 저장고에 보관된 작물 씨앗들은 지구적 대재앙이 있을 경우에만 땅에 옮겨 심겨질 것이다.
국제 과학자 팀은 “이 작물 씨앗들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으며, 이 작물 씨앗들의 미래 역시 우리 인류에게 달려있다”는 말로 스발바드 저장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일단은 작물 씨앗을 현장에서 수집해 와야 한다. 그렇게 해서 건조시킨 후 특수 포일포장을 한 후 저장고에 보관하게 된다. 주아리노는 작물 씨앗을 수집하는, 작지만 열성적인 모임의 일원이다.
작물 씨앗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 주아리노가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매우 중요한 밀 표본, 그리고 같은 유전자를 가진 야생 밀을 수집하는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사람 켄 스트리트는 건조지대에서 자라는 새로운 종을 찾아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로 원정대를 이끌었다.
콜롬비아 칼리에 사는 정열적인 벨기에 과학자 데니얼 드보크는 특이한 콩을 찾아 미 대륙을 30년 동안이나 헤매고 다녔다. 주아리노는 이런 농담도 했다. “그는 콩과 결혼한 사람이지요. 하지만 얼마 전에는 카사바와 바람이 났어요.”
그 외에도 수 십 명의 다른 작물 과학자들과 식물학자, 생물학자들이 부족한 예산 속에서도 위험한 오지에서 종자를 구해오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
생물학적 다양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대 우림이나 고릴라 같은 것을 먼저 떠올린다. 단정하게 심은 옥수수, 콩, 파인애플 등을 떠올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작물들도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의 기본 법칙과 자연 선택의 지배를 받는다.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해 질병에서 살아남고 변화하는 환경조건에 맞추려면 엄청나게 다양한 유전인자를 갖추어야 한다.
유전자은행은 알수없는 미래를 위한 보험이다. 하지만 전 세계 유전자은행 중 많은 곳은 아이가 점심에 먹을 우유를 보관할 수 없을 정도의 열악한 곳에 있다.
앞으로 50년간 작물 수요는 인구 성장 속도에 맞춰 거의 두 배 가량 늘어날 것이다. 그 결과 농업에서 생물학적 다양성을 지키는 일은 이전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작물신탁 이사이자 오리지널 테네시 사람인 캐리 파울러는 “작물의 유전형질(raw genetic material)을 보존해 적응시키는 일은 작물의 생존을 위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유전형질은 씨앗, 식물 섬유, 식물 전체 등 어떤 형태로든 전 세계의 유전자은행에 저장되었다가 필요할 경우 대출이 가능하다.
농부들이나 품종 개량업자들은 땅에 재배하거나 특정 형질을 개량할 목적으로 유전형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유전자은행들은 작물 씨앗 저장고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유전형질을 보존하는 사업은 훨씬 복잡하다.
수 십 년 동안 냉동 상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씨앗도 있기는 하지만 주기적으로 해동시켜 생존성을 실험해야 하는 씨앗도 있다. 당연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건조 및 냉동 과정을 제대로 적용할 수 없는 작물도 있다. 예를 들어 사과의 경우 극저온으로 보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그 대신 콜로라도 포트 콜린스의 커피 농장 같은 시설에서 보관해야 한다. 그 외에도 실험관에서 길러지는 수많은 작물들에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들어가고 있다.
작물을 유전자은행에 보존하는 것은 알 수 없는 미래의 위험을 위한 보험이다. 여기서 지켜낸 생물학적 다양성은 품종 개량업자들이 염도 높은 땅이나 병충해가 심한 곳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작물을 육종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작물신탁의 개발부장 줄리언 레어드는 “어느 나라에서 언제 어떤 작물이 필요할지 아무도 모른다”면서 “르완다에서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 콜로라도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유전자은행은 언젠가 인류를 구할지도 모르는 유전형질을 저장해 두는 얼마 안 되는 믿음직한 곳이다. 국지적 병충해를 겪는 나라의 품종 개량업자들은 어떤 종이 내성을 갖추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종류의 작물을 가지고 실험을 해야 할 것이다.
실제 스트리트는 “품종 개량업자들이 마음껏 고를 수 있는 다양한 씨앗 저장고를 만들어 두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말한다.
시리아에 있는 스트리트의 저장고는 재고가 별로 없는 작은 창고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저장고는 정말로 다양한 종류의 작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그는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의 밀은 투르크메니스탄 고원지대의 밀과 크게 다르다”면서 “이는 진화 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피그미인은 숲속을 달리는 데 적합하도록 적응된 반면 딩카인은 평원을 달리는 데 적합하게 적응된 것과 같은 이유라는 것.
국제적인 유전자은행 네트워크인 국제농업연구자문단(CGIAR)은 세계은행 및 국제연합의 식량농업기구, 기타 여러 기관의 자금지원을 받아 다양한 종류의 작물을 수집해 놓고 있다.
드보크와 스트리트는 현장 원정의 모기지 역할을 하는 각자의 CGIAR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자국 고유의 유전자은행을 운영하고 있으며, 가끔씩 생물학적 다양성을 나타내 주는 표본 수준의 적은 작물 씨앗을 저장하기도 한다.
작물신탁은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물 씨앗들을 기증함으로써 유전자은행과의 연계망을 만들려 하고 있다.
작물신탁에 3,000만 달러를 낸 게이츠 기금의 선임 프로그램 이사인 로이 스타이너는 유전자은행이야 말로 건전한 농업체계의 기반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유전자은행은 자연이 우리에게 수 백 만년의 진화 끝에 해준 것들을 볼 수 있는 도서관”이라면서 “하지만 이 귀중한 유산이 인간의 잘못으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비극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유전자은행은 자금이 부족하고, 조직이 부실하며, 입지 역시 열악한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현재 가장 가난한 나라들에서 지구의 생물학적 다양성이 가장 풍부하게 나타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파울러의 말에 의하면 전 세계에 있는 1,400개소의 유전자은행 중 대부분이 아이가 점심에 먹을 우유를 보관할 수도 없을 정도의 열악한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실제 아부 갈리브는 교도소로 쓰이기 이전에는 이라크의 국립 유전자은행이었다. 이곳은 2003년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약탈되었으며 여기 모아두었던 편두, 호밀, 보리 등의 작물 씨앗들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아프가니스탄의 유전자은행도 1990년대 무자헤딘과의 전투를 거치면서 완전 파괴돼 버렸다. 이후 비밀리에 잘랄라바드의 민가에 유전자은행을 만들었지만 작물 씨앗은 물론 이를 담아 두었던 플라스틱 병까지 도난당했다.
1985년에는 페루의 국립농업연구소에 노숙자들이 난입해 고구마 샘플을 들고 도망쳤다. 지난해에는 태풍이 필리핀의 유전자은행을 덮쳐 엄청난 가짓수의 고구마, 타로 토란, 바나나들이 강물 속으로 떠내려갔다.
유전자은행이 입은 피해는 대체 어느 정도인가? 대답하기란 불가능하다. 파울러는 “무엇이 없어졌는지 모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면서 “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식의 반문을 들으면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5년 내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질병에 버틸 수 있는 작물 씨앗을 잃어버렸다’ 고 답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소리 없이 세계를 구한다
생물학적 다양성을 지키는 전사들은 극히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지극히 모순적이다.
식물 세계의 생물학적 다양성이 유지돼 그들이 노르웨이의 튼튼한 저장고로 힘들여 가져온 작물 씨앗들이 쓰일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잘 풀려준다면 아무도 주아리노나 파울러 같은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항상 그들의 일은 알려지지 않았고, 감사를 표하는 사람도 없다.
아디스아바바의 무질서한 숄라 시장 건너편에 에티오피아 국립 유전자은행인 생물학적다양성보존연구소가 있다.
주아리노는 에티오피아 국립 유전자은행을 돕고, 이 유전자은행과 스발바드 작물 씨앗 저장고와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파울러와 함께 이곳 아디스아바바에 왔다.
3시간 동안 두 사람은 일단의 에티오피아 공무원들과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아 달콤한 커피와 구운 보리를 먹으면서 이 나라의 9대 곡물을 안전하게 유지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아래층에는 논의의 대상이 됐던 작물 씨앗들이 보관돼 있다. 진공 포장돼 냉동된 400 종류 이상의 밀, 수수, 테프(에티오피아의 전통 빵인 인제라를 굽는 데 쓰인다)와 기타 작물 씨앗들이 6만개의 봉지에 담겨 이곳에 있는 것이다.
각 봉지에는 원산지와 종이 같은 씨앗 3,000~8,000개가 들어 있다. 에티오피아는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도 다른 나라와 여러 모로 다르며, 그 점을 계속 유지해왔다.
여기 저장된 작물 씨앗 중 일부는 이미 농업 현장에서는 볼 수 없으며, 이곳에만 저장돼 있다. 지구에서 가장 불안한 대륙의, 가장 가난한 나라의 저장고에 말이다.
아디스아바바 유전자은행의 로비에는 실물 크기의 러시아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사진이 붙어있다. 그는 20세기 초반 농작물의 기원에 대해 기념비적인 이론을 수립한 사람이다.
유전자은행은 구내에 그의 사당을 만들어 두고 싶어 했다. 바빌로프는 작물이 대부분의 진화를 이룬 장소야 말로 가장 큰 생물학적 다양성을 확보한 장소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런 곳에 가야 원하는 형질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유전적으로 취약한 감자가 크게 병충해를 입어 흉년이 든다고 치자. 그렇다면 병충해에 강한 감자는 안데스에 가서 찾아야 한다. 바빌로프에 의하면 감자의 원산지는 그곳이고, 수천가지의 덩이줄기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작물 과학자들은 바빌로프의 다양성 중심 개념을 지지하고 있으며, 바빌로프를 영웅이자 순교자로 떠받들고 있다. 그는 걸어서 또는 낙타나 당나귀를 타고 중국, 볼리비아, 아비니시아(현 에티오피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고는 전 세계에 걸쳐 엄청난 종류의 야생, 농업용 씨앗을 수집해 보존했다. 유전적 다양성이 그 씨앗 속에 있다고 그는 믿었으며, 이것이야 말로 인류의 생존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그의 일을 방해했다. 스탈린은 유전학에 관련된 것을 싫어했고, 바빌로프의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이단시했다. 바빌로프는 50대 초반이던 1940년 쓸데없는 과학을 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투옥됐고, 3년 후 감옥 안에서 굶어 죽었다.
바빌로프만이 작물 다양성을 위해 죽은 러시아 과학자는 아니다.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872일간 포위하고 있을 무렵 바빌로프의 동료들은 그가 세운 유전자은행을 독일군과 굶주린 레닌그라드 시민들로부터 사수하자고 결의했다.
그들은 씨앗으로 가득 찬 유전자은행의 문을 걸어 잠그고 버텼다. 결국 수 십 명의 과학자들은 굶어 죽었다. 파울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어느 쌀 품종 연구가는 쌀자루를 끌어안은 채 자기 책상 앞에 앉아서 죽었어요. 1985년 바빌로프 연구소에 갔을 때 책상 위에 음식이 있는데도 먹지 않고 굶어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에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바빌로프 연구소의 여자 직원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물어보자 잠시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그들은 모두 바빌로프의 제자들이었어요.’ 라고 답하더군요. 그 한마디로 족했어요.”
작물 과학자의 영웅으로 추앙 받는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제자들은 어렵게 모은 작물 씨앗을 먹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작물 씨앗 수집가의 조건
스발바드 저장고와 관련돼 일하는 작물 씨앗 수집가들은 세계의 특정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에 대해 열의를 가져야 한다.
스트리트에게 코카서스는 유전자적 다양성이 풍부하게 숨어있는 노다지 광산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우선 바빌로프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다양성 중심지인데다 철의 장막 덕택에 서구와는 왕래가 단절돼 유전자은행의 보관량이 실제보다 과소평가됐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환경지질학적 갭을 메우는 일, 즉 특정 작물이 자라는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내고 아직 수집되지 않은 유전적 변형들을 모으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다.
스트리트의 CGIAR 수집 품목에서 빠진 것 중에는 매우 혹독한 지방에서 잘 자라는 야생 병아리 콩이 있다.
그는 “여러 가지 병아리 콩들은 이란, 이라크와 국경을 마주한 터키 남동부에서 유통되는데, 상당히 위험한 동네”라면서 “이란의 카스피 해 맨 아래쪽 역시 외국인들에 민감한 곳이라 병아리 콩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구(舊) 소련 영토인 그루지야 공화국에서 병아리 콩이 자란다는 소문을 듣고 거기에 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마치 자신이 CIA 요원이라도 된 것인 양 “우리의 임무는 야생 병아리 콩을 구하는 것”이라며 여행계획을 짰다.
스트리트의 임무에는 구식 러시아제 자동차를 타고 사막과 산길을 달려가거나 외부인들이 잘 오지 않는, 낙타 젖이 풍부한 오지 마을에 가는 것이 포함돼 있었다. 그곳은 거친 동네였으며, AK 소총이 매우 흔한데다 경찰까지도 끊임없이 뇌물을 요구하는 곳이었다. 스트리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우리가 당도하자 그곳 사람들은 마치 UFO라도 나타난 것 같은 반응을 보였어요. 모두 모자와 카메라를 가지고 트럭에서 내렸고, 마을 사람들도 ‘저 사람들 누구야?’ 하면서 비슷한 반응을 보였지요.
하지만 언제나 잘 대해줬어요. 보드카도 많이 줬고...” 드보크는 일을 하면서 탐정이 되어갔다. 1980년대에 그는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많이 자라는 북미 리마 콩의 친척지간인 키 큰 리마 콩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콩은 비교적 맛이 쓰다는 농부들의 이야기, 고대 도자기에도 그려진 리마 콩, 농부들의 밭 가장자리에서 야생 리마 콩이 자라는지 실험한 이야기 등을 듣고 드보크는 그의 팀을 이끌고 리마 콩의 기원을 찾아 나섰다.
그는 “중앙아메리카와 안데스 산맥에서 리마 콩을 길렀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드보크는 콩을 찾아 미 대륙의 들과 숲속 거의 전체를 누비며 어느 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씨앗들을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작물 수집 표본도 철저히 찾아다녔다.
몇 년 전 파리의 작물 표본실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던 그는 위치가 잘못된 견본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미에서만 나는 콩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작물이 든 나무상자 속에 잘못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작물은 프랑스 탐험가가 플로리다에서 퀘벡까지 탐사하면서 얻은 것임을 알게 됐다”면서 “그 콩은 분명 미국 동부에서 발견된 새로운 콩”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남부 플로리다에서만 나는 야생 콩을 찾아다니고 있다. 다행히도 국유지로 지정된 곳이 있기 때문에 그런 콩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유지에는 다른 콩들이 자라고 있어 앞으로 그런 콩이 자라기는 힘들다. 그는 “이것은 이제 유전자은행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적은 비용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
스발바드 저장고를 위해 일하는 주아리노, 스트리트, 드보크, 파울러 등의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지키려고 일한다.
게이츠 재단의 스타이너는 “농업의 생물학적 기본은 다양성”이라면서 “자연은 수 백 만년 동안의 실험을 통해 여러 가지 생물종을 각 지역 특유의 생태계에 맞게 적응·발전시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농업은 대단히 지역적인 문제”라면서 “최후의 날이 온다면 대부분의 단일 농업지역은 지탱해 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에티오피아의 작물들도 산업형 농업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에티오피아 환경보호청의 청장이자 아프리카 국제조약 상임 대표인 테올드 버한 지브레 에지아버는 에티오피아가 토종 작물을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 섰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이제 인류는 유전자 자원을 보호하지 못한 채 근대화의 폐단을 배우고 있다”면서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파울러도 이에 동의한다. 그는 “이 문제는 현재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전 세계적 문제”라면서 “기후온난화 같은 문제는 해결책도 명확치 않고, 해결에 얼마만한 비용이 드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이 문제는 훨씬 적은 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디스아바바 숄라 시장의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에티오피아인들은 주아리노의 표현을 빌자면 벼랑 끝에 내몰린 삶을 살고 있다. 흉작이 한 번만 와도 엄청난 기근이 들 수 있다.
주아리노가 도시의 남쪽 교외로 차를 몰고 가자 나무보다 당나귀가 더욱 많은 마을이 나왔다. 또한 구아리노는 티셔츠 위에 다 떨어진 신사복을 입고 갈색 밭에서 소를 몰아 쟁기질하는 맨발의 소년들을 지나쳤다.
그는 “저 사람들에게 혼합형 작물을 주면 몇 년 동안은 잘 키울 것”이라면서 “하지만 현재 저들이 예전에 갖고 있던 작물 씨앗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뭄이 한번만 제대로 닥치면 작물 씨앗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면서 “그러고 나면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게 된다”고 덧붙였다.
스발바드 저장고를 백업으로 하는 유전자은행 네트워크가 이런 재앙에 대한 유일한 보험인 셈이다. 바빌로프의 제자들은 연구를 위해 신념을 가지고 목숨을 버렸다. 스발바드 저장고 역시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만들어졌다는 점을 파울러는 지적했다.
파울러는 “사람들은 세계가 언젠가 불길에 휩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 때가 오면 스발바드 저장고는 세계를 부활시킬 씨앗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발바드 저장고와 관련돼 일하는 작물 씨앗 수집가들은 세계의 특정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에 대해 열의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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