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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구시대 보내며…희망의 새시대 맞으며…"안녕"

미디어아티스트 박찬경

5년만에 국내개인전 '안녕'

26분6초짜리 '시민의 숲'

역사서 소외된 사람들에

애도와 희망 메시지 전해

영상작품 ‘시민의 숲’ 앞에 선 작가 박찬경 /사진제공=국제갤러리




갓을 쓴 여고생이 긴 나팔을 불며 산을 오른다. 이 얼마나 기괴한 풍경인가. 쫓기듯 황급히 움직이는 묘령의 여인, 사형수의 얼굴을 가리기 위한 고깔모양 바구니를 쓴 사람이 숲으로 들어간다. 낫을 들고 산을 탄 사내는 머리가 잘린 채 허공을 향해 죽창을 던진다. 눈도 머리도 없는 그가 숲에서 주워든 삐라(유인물)에는 ‘조국을 통일하라’고 적혀있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작가 박찬경이 지난해 제작해 타이페이 비엔날레를 통해 처음 공개한 26분 6초짜리 3채널 비디오·오디오작품 ‘시민의 숲’이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2관에서 전시중이다. 5년 만에 열리는 국내 개인전 ‘안녕(Farewell)’을 통해 이 작품을 포함한 12점의 근작들이 오는 7월 2일까지 선보인다.

작가는 한을 안고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을 그린 판화가 오윤(1946~1986)의 미완성작 ‘원귀도’와 김수영(1921~1968)의 시 ‘거대한 뿌리’에 착안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흑백 영상 속 등장인물은 무전기를 숨기고 농부로 위장한 남자, 가방 멘 학생들, 셰퍼드를 끌고 나온 양복 신사, 목사 차림의 남자와 함께 굿판을 벌이는 망령 같은 사람들이다. 첨예한 이념과 진영의 대립이 결국 ‘망령’이라는 뜻인가. 굿부터 기도까지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의를 지내며 ‘안녕’을 기원한다. 물에서 꺼낸 해골, 진도상여소리와 함께 지나는 꽃상여 등이 의미심장하다.

다만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놓은 듯 가로로 긴 화면에서 동시 상영되는 세 장면을 한 번에 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이런 불편함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관점으로 단숨에 통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꼬집는 것만 같다.

박찬경이 영상작품 ‘시민의 숲’을 착안하게 한 판화가 오윤의 ‘원귀도’. 박 작가는 이 그림 아래에 “귀신의 행렬 위로 공중을 떠도는 원귀들이 있다. 귀신이 되어서도 귀신 사회에 끼지 못하는 영혼이다”라고 적었다. /사진=조상인기자


박찬경 ‘시민의 숲’ 한 장면 /사진제공=국제갤러리


박찬경의 ‘시민의 숲’ 한 장면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박찬경은 1990년대 평론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고 1997년 금호미술관 개인전을 시작으로 냉전과 남북갈등을 소재삼아 실재와 허구를 넘나들며 역사의 재구성 같은 작업을 펼쳐왔다. 특히 최근에는 소외된 역사의 한 부분인 무속신앙을 통해 성찰 없이 달려온 한국 근대화의 비틀어진 부분을 지적한다. ‘시민의 숲’에 대해 작가는 “세월호 사고를 비롯해 동학농민운동, 한국전쟁,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희생자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 이름없이 간 사람들에 대한 애도의 장”이라며 “무시했고 소외됐던 역사 속 사소한 것들, 우리 집단적 무의식에 남은 것들을 시각화했다”고 소개했다.

박찬경 ‘명두 5’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전시장 한쪽 벽을 차지한 ‘작은 미술사’는 박찬경이 자신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미술사와 작품들을 보여준다.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시민의 숲’이 어두운 공포물이라면 또 다른 작품 ‘승가사 가는 길’은 밝고 키치(kitch)하다. 달력 사진 같은 멋진 산 풍경 사이사이에 일상 소품들이 등장하는 영상에 대해 작가는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고 틈만 나면 산으로 가는 사람들 안에 뭔가 전통의 기억이 남아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며 “뒤집어보면 페이소스(연민·동정 등)가 있는 우리 현대문화 속의 감상적 단면”이라고 말했다.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사용하는 액막이 금속용구인 ‘명두(明斗)’를 소재로 제작한 신작 ‘밝은 별’이 눈길을 끈다. 단청 채색한 자작나무 판에 둥근 구멍을 내고 명두를 넣었는데 돌려본 뒷면에는 북두칠성이 새겨 있다. 박찬경이 선택한 그림들로 한쪽 벽을 채운 ‘작은 미술사’는 작가가 독자적 시선으로 재해석한 미술사로, 서구 중심의 사고에 문제를 제기해 오늘의 이 현실을 직시하자는 제안이 숨어있다.

전시명 ‘안녕’은 희생자에 대한 애도이자 구시대를 보내는 안녕이고 희망을 말하는 안녕이기도 하다. 출품작 ‘시민의 숲’은 오는 15일 공식개막하는 세계 최대 아트페어인 스위스 아트바젤의 특별전 ‘언리미티드’에서도 소개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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