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는 1828년 로마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의 비극적 죽음을 다룬 역사풍경화 한 점을 제작했다. 레굴루스는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포로가 된 고대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기록에 따르면 양국의 포로 교환을 협상하기 위해 카르타고 정부는 그를 로마에 특사로 파견했으나 레굴루스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 적과의 협상을 중단할 것을 원로원에 권했다. 이후 협상에 실패한 채 카르타고의 포로 신세로 되돌아간 그는 눈꺼풀이 잘려 두 눈이 실명되는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
로마인들은 자신의 안위보다 국가를 위해 행동한 레굴루스의 선택을 높이 평가했다. 로마인들은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상충할 때 공인이 취해야 할 자세를 레굴루스가 보여줌으로써 로마의 도덕적 규범이 바로잡혔다”고 칭송했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시련을 겪어보지 않는 자는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글을 남겼다. 그의 관점에서 공적 윤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한 레굴루스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증명한 위대한 본보기였다. 낭만주의 화가 터너에게도 이러한 레굴루스의 전설적 운명은 매우 매력적인 작품 주제로 인식됐다.
로마 시대의 실제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풍경화의 형식으로 역사적 주제를 실현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그림에서 레굴루스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표출한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수평선 너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석양빛이 레굴루스에게 닥쳐올 가혹한 운명을 암시해줄 뿐이다. 그를 카르타고로 인도할 배가 정박해 있는 항구는 노란색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빛은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상징 요소다. 관람자들은 빛과 색을 통해 레굴루스가 눈이 머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체험하며 이 작품의 주제를 감각적으로 공유하게 된다. 빛의 효과를 통해 작품 주제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감상자들의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터너의 풍경화 기법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제공했다. 사실상 인상파 미학은 터너의 그림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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