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그에게 심장을 준 기증자는 할리우드에서 20 년간 일한 스턴트맨이었다. 이처럼 장기 이식자들에게 기증자의 성격이나 습관이 그대로 전이되는 현상을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라 한다.
박소란 기자 psr@sed.co.kr
"이 사람만 보면 이유 없이 자꾸 가슴이 떨려요. 마치 오래 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바람둥이 도형은 민주를 만난 뒤부터 원인 모를 가슴 떨림을 느낀다.
그녀만 생각하면 터져버릴 듯한 심장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민주에게 끌리는 마음을 그 자신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도형은 5년 전 불의의 사고를 겪은 후 심장 이식 수술을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심장을 기증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민주의 전 남자친 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현재 TV에서 방영 중인 아침 드라마 '두근두근 달콤'의 주요 스토리 다. 모르긴 몰라도 두 주인공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을 확인하며 달콤한 해피엔딩을 맞게 될 것이다. 과연 이들을 끌어당긴 보이지 않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운명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일까.
수술 후의 특별한 변화
운명적 사랑을 그린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셀룰러 메모리. 우리말로는 '세포기억설'이라 하는, 장기 이식 수혜자들에게 기증자의 습성까지 전이되는 이 현상은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의 심리학자 게리 슈왈츠 교수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20년간의 연구를 통해 이러한 셀룰러 메모리 사례 70여건을 모아 발표했는데 그중 잘 알려진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7세 소녀 제니퍼. 그녀는 수술 후 지속적인 악몽에 시달린다. 그녀가 반복적으로 꾸는 꿈은 살인자에 의해 자신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제니퍼는 자신의 심장 기증자가 살인사건에 휘말려 희생된 소년이었음을 알게 됐으며 꿈속의 기억으로 몽타주를 그려서 결국 소년의 살해범을 잡는 데 일조했다. 역시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63세 남성 윌리엄은 수술 후 갑자기 뛰어난 그림 실력을 발휘했다.
수술 전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초등학생 수준의 그림 실력을 가졌었던 그인데 말이다. 그에게 심장을 기증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마추어 화가로 밝혀졌다. 두 사례보다 한층 충격적인 것도 있다. 평소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69세의 남성 소니는 심장 이식 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13년 후 급기야 자살을 하기에 이른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심장 기증자 역시 과거 자살로 생을 마감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소니가 택한 자살 방법도 기증자와 동일한 것이었다고 한다. 슈왈츠 교수가 제시한 이 같은 사례들은 다소 극단적인 것으로 비춰지는 게 사실이다.
과연 다른 평범한 장기 이식 환자들도 이와 유사한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1990년대에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 의과대학의 브리지트 분젤 교수가 특별한 실험을 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대학병원에서 장기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 47명을 대상으로 수술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에 환자들을 인터뷰해 수술 전과의 변화를 확인한 것. 그 결과, 환자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분류됐다. 자신들의 성격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답한 그룹, 성격이 변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장기로 인한 것은 아니라고 답한 그룹, 그리고 스스로 느끼기에 현저하게 성격이 변했다고 답한 그룹이 그것이다.
이중셀룰러 메모리와 유관한, 다시 말해 장기 이식 후 현저한 성격 변화가 나타났음을 체감한 환자는 총 3명으로 전체의 6%를 차지했다. 45세의 한 남성은 17세 소년의 심장을 이식 받고 나서 자신에게 나타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고 한다.
"볼륨을 크게 높여 음악을 듣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이제껏 그런 적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죠. 새 자동차에 성능 좋은 스테레오 스피커를 장착하는 것이 현재 저의 꿈입니다. 과거에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을 생각하게 된 겁니다."
분젤 교수는 또 이 남성이 장기 기능자가 아직 자기 몸속에 살아있어 마치 두 사람분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얘기했다고 밝혔다. 분젤 교수가 그런 느낌을 받는 것에 대해 기분이 어떠하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들'은 괜찮습니다."
오장육부에서 각막까지
주지하다시피 이번 조사에서 대다수 환자들은 수술 이후에도 성격 등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몸속에 다른 사람의 장기가 작동하고 있다고 해서 정신적 부분까지 변하지는 않았다고 피력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몇몇 전문가들은 단순히 환자들의 개인적 생각을 믿고 셀룰러 메모리의 개연성을 부정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강조한다. 분젤 교수의 연구에서도 수술 후 성격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답한 환자들이나 성격이 변하기는 했지만 장기이식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답한 환자들은 대체로 매우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드러냈다.
일례로 수술 후 성격이 변했다고 생각하는지, 그런 생각이 당신의 심장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보는지 등의 질문에 즉각 "그런 생각은 정말 바보 같은 것"이라고 대답하며 다급히 화제를 돌리거나 대화를 중단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행동은 환자들의 말과 달리 실제로는 이식 수술 후 어떤 정신적 변화를 체감했거나 혹은 그러한 변화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지 걱정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어느 정도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태에서 발현되는 행동 경향이라는 뜻이다. 이쯤해서 지금껏 언급된 셀룰러 메 모리의 사례자 모두가 공교롭게도 심장 이식 환자라는 사실을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의 생명이 다했는지는 심장이 박동하고 있는지로 판단했을 만큼 심장은 인체에서 생명과 다름없는 중요한 장기로 인식돼 왔다. 동양 의학에서도 심장은 인체를 조정하는 위치에 있다고 설명된다. 동의보감에는 '심자군주지관(心者君主之 官)'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심장이 여러 장기 중 왕과 같은 위치에서 오장 육부로 이뤄진 몸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양의 경우 오랫동안 심장을 감정의 근원으로 여겼다. 이 점에서 심장이 바뀌는 것은 곧 사람이 바뀌는 것이라는 조금은 무속적인 추정을 해볼 수 있다. 혈액을 공급하는 펌프로서의 역할 외에도 심장에는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훨씬 강력한 기능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셀룰러 메모리는 비단 심장 이 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간, 신장, 췌장, 폐 그리고 각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기들이 두루 거론되고 있다. 슈왈츠 교수의 사례들 가운데 하나를 더 들어보면 37세 여성 쉐릴은 신장 이식 수술을 받은 뒤 독서취향이 180도 변했다.
연예인 가십 기사만 찾아 읽던 그녀가 도스토옙스키나제인 오스틴 같은 문학적·철학적 소설에 급격히 빠져든 것이다. 이렇듯 쉐릴 자신도 놀랄 만큼 그녀를 바꿔놓은 주범으로 보이는 신장의 원래 주인은 고전문학을 좋아했던 국어교사였다.
장기 세포의 기억 능력
이 같은 일련의 현상들에 대해 슈왈츠 교수는 장기 세포에도 기억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의 습관이나 취미, 특기, 취향 등은 뇌세포뿐만 아니라 각 장기의 세포에도 저장된다는 설명이다. 이로 인해 장기를 이식 받는 과정에서 당연히 기증자의 기억 일부가 수혜자에게 전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재 하트 매스연구소(IHM)의 룰린 맥크레이티 이사는 심장에 신경세포들로 이뤄진 작은 뇌가 있어 두뇌의 명령 없이도 스스로 박동하며 기억과 감정을 인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일부 연구자들이 심장을 비롯한 인체 장기들이 세포 기억 능력을 지녔다는 주장에 지지를 보낸다.
이들의 생각대로 정말 우리의 심장과 간이 뇌의 편도체가 그러하듯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을까. 이 놀라운 가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불행하게도 지금으로선 누구도 단정할 수 없는 상태다.
다만 오늘날 셀룰러 메모리에 대한 주류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셀룰러 메모리를 입증하기 위한 연구자들의 시도가 잇따랐지만 아직껏 이렇다 할 과학적 결론을 이끌어 낸 경우는 전무한 탓이다. 즉 셀룰러 메모리로 '의심'되는 체험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특별한 사례일 뿐이며 일반화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설령 다수의 수혜자들이 스스로의 정체성 변화를 느끼고 있음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일본 시마네 대학의 문화인류학자 데구치 아키라 교수도 이에 동의하는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마음 을 이식한다'에서 소수 환자들의 사례만을 가지고 장기 세포가 기억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장기 이식 후 스스로 어떤 변화를 감지하고 기증자를 찾아 나선 수혜자들은 자신의 변화가 기증자의 생전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를 찾는 데에만 열을 낸다. 이처럼 어떻게든 공통점만을 찾으려 한다면 기증자가 누구든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게 아키라 교수의 설명이다.
사실 이는 장기 이식자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개인이 가진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가지의 습관과 성향들 중에서 단 하나의 공통점을 찾는 일은 글자 그대로 식은 죽 먹기와 같다.
자기최면의 산물?!
이보다 더 극단적으로는 셀룰러 메모리 자체를 아예 상상의 산물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장기를 이식하면 기억까지 전이된다는 개념은 극적인 것을 요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만들어낸 그럴듯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심리적인 부분과 연관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이들은 환자들이 겪는 변화들은 사실상 세포의 기억 능력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암시나 자기 최면을 통해 형성된 거짓 느낌일 수 있다고 본다. 장기 이식을 통해 새 생명을 얻게 되면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심리적 욕망이 작용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변화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 관점에서 여러 심리학자들은 장기 수혜자가 기증자의 신상정보를 알게 될 경우 기증자의 성향과 유사한 변화를 맞게 될 개연성이 더욱 높아진다는 견해를 펼친다. 수혜자가 무의식적으로 기증자와 닮고 싶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현 시점에서 세포의 기억 능력을 100% 부정하는 것 또한 다소간의 어폐가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뇌가 아닌 다른 인체 조직에서도 어느 정도 정보 처리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계의 기능을 조절하는 신경펩티드(neuropeptide)가 그 실례다. 갑상선, 흉선 등 내분비기관에서 분비되는 대다수 신경펩티드는 표적이 되는 세포의 수용체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고 그 기능을 조절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와 관련 미국 조지타운대학 생물물리학자 캔디스퍼트 교수는 저서 '감정의 분자'에서 인체가 펩티드를 통해 서로 의사소통을 하며 펩티드의 총합이 우리의 감정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펩티드들이 정보를 주고받으며 매 순간 무의식적인 활동까지 지배한다는 것. 따라서 퍼트 교수는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려면 수용체라는 분자 단위의 세포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한한 가능성
학자들 사이에서의 논쟁들을 살펴볼수록 셀룰러 메모리의 진위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과연 셀룰러 메모리의 실체는 무엇일까. 세포의 기억 능력이 불러일으킨 과학적 현상일까.
장기 이식과는 무관한 무의식적 자기 최면의 발로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미스터리한 우연이거나 환자 개인의 착각인 것일까. 현 단계에서는 무엇이든 정답이 될 수 있고, 또한 모두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아직은 모든 것이 그저 가설일 뿐이다.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국에서는 장기 이식 후 이해하기 힘든 변화를 경험했 다고 말하는 수혜자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데구치 교수도 셀룰러 메모리나 장기 세포의 기억 능력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많은 환자들이 장기 이식 수술 후 기증자의 인격이 자신의 몸으로 들어 와 있다고 느끼는 것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수혜자들이 '기증 받은 심장이 누구인지도 잘 알지 못하는 내 몸 속에 자리 잡는 것을 싫어 해 몸 밖으로 튀어나오려 한다'는 느낌을 공통적으로 받고 있다"고 전한다.
참고로 데구치 교수는 장기 이식 후 수혜자들이 여러 미스터리한 현상에 시달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수혜자 자신의 세포를 이용한 자가 유래 줄기 세포 인공장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어쨌든 셀룰러 메모리로 불리는 갖가지 현상은 단지 면역체계가 타인의 장기를 이물질로 인지해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장기이식 거부반응과는 분명히 다르다.
여기에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비밀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과학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그 오랜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인체의 신비를 밝히려는 다각적인 연구들이 진행되면서 언젠가 진실의 베일이 벗겨질 것이다.
혹 그때가 되면 "심장이 기억을 한 다니, 당신 미쳤군"이라고 비아냥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진리를 내일의 휴지조각으로, 오늘의 궤변을 내일의 정설로 뒤바꿔 놓는 것. 그것이 바로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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