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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증거 : 제노글로시

XENOGLOSSY MYSTERY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늘지 않은 것이 외국어 실력이다. 학원에 돈을 쏟아 붓고, 교재를 달달 외원도 실전에서는 벙어리가 되기 일쑤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배우지도 않은 외국어를 마치 그 나라 사람인 듯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있다.

웬 초능력이냐고? 혹자는 이를 놓고 전생 혹은 환생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혹자는 뇌에 충격을 받은 결과라고 설명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박수옥 과학칼럼니스트 sooook49@naver.com

지난 2007년 9월 한 가지 흥미로운 소식이 해외에서 전해졌다. 모터사이클 경주 중 머리를 다친 체코 청년이 사고 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한 것. 그 주인공은 18세의 마테즈 쿠스. 사고 당시 헬멧이 산산이 부서질 만큼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았는데 45분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그는 뜻밖에도 의료진에게 영어로 자신의 상태를 설명했다. 사고 전 쿠스는 영어에 문외한이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영국 뉴스 앵커 수준의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다. 얼마 뒤 그의 이 같은 '초능력'이 빛을 잃을 것이다. 영어 실력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물론, 사고 전후 약 이틀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딘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후 정신을 잃었던 순간만 기억해냈다.

쿠스의 경우에서처럼 특별히 배운 적도 없는 외국어를 자신도 모르게 유창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제노글로시(xenoglossy)'라고 한다. 프랑스의 생리학자 찰스 리체가 만든 용어로서 그리스어로 '외국의'라는 뜻을 가진 '제노(xeno)'와 '혀' 혹은 '언어'라는 의미를 지닌 '글로시(glossy)'의 합성어다.

제노글로시는 쿠스 이전에도 몇 차례 학계에 보고된 적이 있다. 극히 희귀한 사례지만 대부분의 제노글로시는 매우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건 당시 사용했던 언어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주지하다시피 제노글로시의 정확한 과학적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학계의 의견도 엇갈린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인정하는 반면 언어학자들은 일절 부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생에 사용한 언어?!

현대 과학으로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제노글로시에 대한 가장 손쉬운 해석은 염력과 같은 일종의 초능력으로 보는 것이다. 외부 충격으로 인해 자신의 인격은 그대로 유지된 채 일시적으로 배우지 않았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생성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기전에 의해 이런 능력이 발현됐는지는 누구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하는 초심리학자들 중에는 전생을 거론하기도 한다. 환생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초심리학자 이안 스티븐슨 박사는 제노글로시 현상을 전생의 흔적이라 주장했다. 특별한 계기에 의해 전생에서 사용했던 언어가 현생에서 재생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전생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전생에 살던 곳의 언어를 되살려내는 현상을 진성이언(眞性異言)이라고 한다.

일본의 과학칼럼니스트 쿠가 라나이가 쓴 '과학, 미스터리를 읽다'에 의하면 스티븐슨 박사는 1,000건 이상의 환생 사례를 수집했다. 그리고 저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을 통해 불가사의한 환생 이야기를 다수 소개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배우지도 않은 언어를 갑자기 말하는 경우다.

스티븐슨 박사는 사회화가 덜 된 어린 아이들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고 여겼으며, 제노글로시 역시 주로 유아기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른이라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국어를 학습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어린 아이라면 다르다. 사실상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어린 아이에게 나타나는 제노글로시 현상을 전생이나 환생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라고 판단했다.

스티븐슨 박사의 논리대로라면 앞서 소개됐던 쿠스는 전생에 영어권, 특히 영국 문화권에서 살았으며, 사고로 때문에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것이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피츠버그대학의 언어학자 사라 토마슨 교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녀는 스티븐슨 박사의 생각에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스티븐슨 박사는 1970~1980년대에 몇 가지 대표적인 제노글로시 현상을 대중에게 공개한 적이 있다. 1974년 발표된 그레트헨의 사례도 그 하나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던 이 미국 여성은 최면상태에서 자신이 전생에 독일에 살았던 그레트헨이라 주장했다.

"아버지는 베를린 인근 에베르스발데의 시장이었고 저는 16살에 죽었어요."

그레트헨이라는 전생 인격이 구사한 독일어 단어는 총 206개였는데 당연히 그녀는 현생에서는 단 한 번도 독일어를 배운 적이 없었다.

토마슨 교수는 이 사례를 집중 분석했다. 그 결과, 피험자 여성이 완전한 독일어 문장이 아닌 몇 개의 쉬운 단어들로만 말을 했음을 알아냈다. 굳이 독일어를 배우지 않았어도 독일 영화를 자주 보는 것 정도로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을 만한 기본적인 단어였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토마슨 교수는 피험자가 독일어를 말한 것은 우연히 들었던 독일어 단어들을 최면 상태에서 나열한 것일 뿐 전생과는 무관하다고 반박했다. 또한 제노글로시를 타국 언어에 노출된 소소한 경험들이 무의식에 잠재돼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지극히 어설픈 형태로 표출된 것이라 분석했다.





뇌경색의 전조증상

제노글로시에 대한 연구를 오랫동안 이어온 대표적인 연구자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임상신경학자 제니퍼 거드 박사를 꼽을 수 있다. 그녀는 제노글로시의 실체를 두뇌의 병리학적 측면에서 규명하고자 했다. '일과성 허혈 발작(TIA, Transient Ischemic Attacks)'을 제노글로시의 다른 얼굴로 파악했다.

TIA는 뇌의 일부에 일시적으로 혈액 공급이 중단되면서 뇌졸중 증상이 발생하는 질환이다. 반신 마비, 실어증, 실명 등을 겪게 되지만 보통 24시간 이내에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회복된다. 보통 뇌경색전조증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증상이 회복됐다고 병원을 방문하지 않으면 자칫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 있다. 확산강조 자기공명영상(diffusion weighted MRI, DWI)으로 촬영해보면 실질적 뇌손상이 동반돼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거드 박사는 제노글로시를 경험한 이들이 TIA에 의해 뇌에 작은 외상을 입으면서 발음, 악센트, 높낮이 등을 제어하는 언어기능이 망가진 것이라 생각했다. 해당 외국어를 실제로 말한 것이 아니라 악센트나 발음이 그 외국어와 비슷해 사람들의 착각을 유발했다는 의미다. 주변인들의 착각일 뿐이라는 게 다소 어폐가 있어 보이지만 제노글로시 경험자 중 몇몇이 그 시기를 전후해 뇌졸중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TIA가 원인일 수도 있다는 그녀의 지적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과학, 미스터리를 읽다'에 적시된 내용에 따르면 거드 박사는 제노글로시와 관계된 일련의 연구를 통해 우리 뇌에는 각국의 악센트에 연관된 몇 개의 개별 모듈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어 모듈', '영어 모듈' 등의 식으로 각국 언어에 대응하는 부분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영어를 공부할 때 실력이 늘어가는 것은 영어 모듈 부분을 꺼내 쓰게 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언젠가 뇌 속의 각 언어 모듈 위치를 찾아낸다면 큰돈을 들여 어학연수를 가지 않고도 완벽한 발음과 악센트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단순히 발음 변화에 의한 착각으로 쿠스처럼 외국인과 외국어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학계의 이론은 한 가지뿐이다. 제노글로시가 두뇌의 병리학적 사정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일정한 충격에 의해 언어능력과 관련된 뇌의 특정 부분이 자극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게 그것이다. 이는 현재 가장 많은 학자들이 공감하는 학설이기도 하다.



우주탐사
의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뇌의 작동기전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조족지혈이다. 뇌 과학이 우주탐사에 비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언어를 관장하는 뇌

정말로 제노글로시가 언어를 관장하는 뇌의 어떤 부위와 관련된 현상이라면 제노글로시의 진실을 파헤치는 핵심은 정확히 어떤 부위에 어떤 영향이 미쳐졌을 때 일어나는지를 파악하는데 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지에 대한 실로 당연한 능력은 아직 정확한 과정이 밝혀지지 않았다. 언어는 그저 오랫동안 문화적 산물로 인식됐을 따름이다. 하지만 여기에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과학 전문 작가 존 말론은 저서 '21세기에 풀어야 항 과학의 의문'에서 언어를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한 몇몇 학자에 대해 소개한다. 그는 미국의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박사를 필두로 많은 학자들은 사람이 말을 하는 행위를 거미가 거미줄을 짜는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 견해는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정면 배치되는 이론이다. 그러나 여러 세대에 걸쳐 다양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언어 습득은 어린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것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은 누구의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언어를 익힌다는 얘기다. 부모 등 가족들의 직접적 지도에 따른 효과는 놀라울 만큼 미미하다고. 그렇다면 언어 본능은 뇌의 어느 부분과 밀접할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존 말론도 뇌의 왼쪽을 지목했다. 이는 19세기 프랑스의 한 해부학자가 심각한 언어 장애가 있던 환자들의 뇌를 해부하여 증명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좌뇌가 손상돼 있었고, 손상의 핵심 부위는 바로 측두엽과 두정엽이 만나는 지점이었다고 한다. 이후 이 부위는 '실비우스 열구(fissure of Sylvius)'라 명명됐다.

하지만 인체의 소우주라 불리는 뇌가 대개 그렇듯이 이 부위의 작동기전에 대해서도 거의 드러난 바가 없다. 실비우스 열구가 정확히 어떤 부분의 언어를 관장하는지도 아직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오늘날 뇌의 언어적 사고를 처리하는 부위는 주로 두 곳이 거론된다. 감각성 언어 중추인 '베르니케 영역(Wernicke area)'과 운동성 언어 중추인 '브로카 영역(Broca area)'이 바로 그곳. 뇌의 좌반구 측두엽에 위치한 베르니케 영역을 통해 언어를 읽고, 듣고, 이해한다면 전두엽에 위치한 브로카 영역을 통해 말을 한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추론이다.

그러나 글자 그래도 이는 아직 추론이다. 핑커 박사는 이런 주장을 펴기도 했다.

"우리 뇌에는 명사와 관계된 부분과 동사와 관계된 부분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 부위들은 아마도 작은 물방울무늬이거나 얼룩무늬, 혹은 줄무늬 같은 형태로 뇌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 전체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불규칙한 모양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뇌의 융기한 부분들과 접힌 부분들로 뻗어나간 모습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추정이다. 현재로서 뇌는 미지의 영역에 가깝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노글로시가 설령 뇌의 언어를 관장하는 부위와 관련된 현상이라 하더라도 그 실체에 접근하기는 매우 까다로운 게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다행히 뇌 과학계에서 현재 그 실체 파악을 위해 다양한 연구들을 진행 중에 있다. 조금씩 밝혀지는 내용들조차 극도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어, 명확한 해석을 내리기가 쉽지 않지만 말이다. 이에 더해 인간이 유일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언어와 관련된 뇌의 부위를 파악하기가 생각 이상으로 어려울 것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쩌면 이 사안이야말로 뇌 연구의 가장 마지막 관문이 될지 모른다는 일부 학자들의 너스레가 단순한 너스레가 아닐 수도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제노글로시의 결계를 푸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과제라는 의미가 된다. 제노글로시가 뇌에서 일어난 작용인지의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거드 박사는 제노글로시와 관계된 일련의 연구를 통해 우리 뇌에는 각국의 악센트에 연관된 몇 개의 개별 모듈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인슈타인의 뇌

수학 천재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언어 지진아이기도 했다. 다섯 살이 되어서야 겨우 말을 하기 시작했으며, 성장하면서도 국어(독어) 성적은 언제나 하위권에 머물렀다고 한다.

1955년 76세의 나이로 그가 유명을 달리하자 사후에 자신의 뇌를 연구해도 좋다는 그의 말에 따라 학자들은 부검을 시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캐나다 맥마스터대학의 생물학자 샌드라 위텔슨 교수팀이 연구용으로 보유하고 있던 정상인들의 뇌와 아인슈타인의 뇌를 비교 분석했다.

이렇게 연구팀은 아인슈타인의 뇌가 가진 독특한 차이를 찾아냈다. 구체적으로 그의 뇌 무게는 1,230g으로 예상과 달리 보통 사람과 차이가 없었다. 크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뇌의 두정엽이 정상인보다 15% 정도 더 넓었다. 두정엽은 공간 구성과 계산 능력을 담당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그의 비상한 수학·과학적 능력은 두정엽이 크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학자들은 파악했다.

그런데 뇌의 크기가 일반인과 동일한데 두정엽이 유달리 넓다면 분명 일반인들보다 좁은 부위가 존재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향후 그곳을 파악해 연구한다면 인간이 가진 언어능력의 본질에 한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른다. 참고로 아인슈타인의 뇌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생긴 것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 물리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처럼 특이한 생김새를 지니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오늘날의 학자들은 양쪽 모두가 작용했을 것으로 믿고 있다.

뇌경색 (cerebral infarction) 조직이 혈류의 급격한 차단에 의해 죽는 것.
전조증상 (前兆症狀, prodrome) 특정 질병이 본격 발병되기 전에 나타나는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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