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세상에 선보인 K9은 기아차의 욕망을 담고 있다. 기아차는 K5와 K7으로 연타석 안타를 쳤지만,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할 최후의 무기가 필요했다. 2013년형 K9은 디자인은 물론 기능 면에서도 매력을 뿜어내며 소비자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하제헌 기자 azzuru@hk.co.kr
검정색 K9은 주차선 안을 꽉 채우고 서 있었다. 자동차의 인상을 결정짓는 건 라디에이터그릴과 헤드램프다. K9은 K5부터 시작된 기아차 패밀리룩을 따르고 있다. 기아차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앞 모습이지만 인상이 더욱 뚜렷하고 강하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5미터가 넘는 차체지만 K9은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후륜구동 차량에서 뽑아낼 수 있는 디자인 요소를 잘 살린 탓이다. 짧은 오버행, 긴 후드, 짧게 튀어나온 트렁크는 균형 잡힌 비율로 K9을 제법 스포티하게 만들었다. K9이 프리미엄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지만 1년이 지났다. K9은 월 500대가량 팔려 나가고 있지만 기아차는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다. 올해 기아차는 2013년형 K9을 내놓았다. 소비자 선호도가 높은 편의장비를 기본사양으로 탑재하고 차 값은 낮췄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품성을 높여 더 많이 팔겠다는 의지다. 기본 모델인 3.3리터 프레스티지는 헤드업디스플레이와 18인치 휠·타이어, 어댑티브 HID 헤드램프, 앞좌석 냉난방 통풍 시트 등을 기본 적용했지만 판매 가격은 5,228만 원으로 동결했다. 윗 모델인 3.3이그제큐티브는 헤드업 디스플레이와 전동식 트렁크, 19인치 휠·타이어, 뒷문과 뒷유리창 햇빛가리개 등을 기본 적용하면서도 가격을 300만 원 가까이 내렸다. 가장 비싼 3.8리터 프레지던트 모델도 8,538만 원으로 100만 원가량 낮췄다.
주차된 K9은 2013형 3.8리터 모델이다. 문을 열자 K9은 깊은 속살을 드러냈다. K9은 직접 타봐야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 실내 크기가 에쿠스와 같다. K9은 단순히 실내 공간이 넓은 것만 자랑하지 않는다. K9은 속이 꽉 차 있다. 운전석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버튼들이 빼곡하다. 시동버튼을 눌렀다. 웅~ 하는 엔진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사라진다. 시동이 걸렸지만 소음도 진동도 없다. 대형 LCD 계기반은 가상 그래픽으로 속도계와 엔진회전계를 보여준다.
K9에는 현존하는 자동차 안전·편의 장치가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면 달려봐야 한다. 기어 손잡이에 달린 전자식 파킹브레이크 버튼을 눌러 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드라이브모드에 놓았다. 가속페달을 밟았다. 초기 반응이 묵직하다. 점잖다. 진중하게 출발했지만 오른발에 힘을 주자 바로 운전자를 등받이로 밀어붙인다. V6 3.8리터 직분사 휘발유 엔진이 선사하는 펀치력이다. 최고출력 334마력에 최대토크 40.3kg·m. 이 정도 힘이면 어디 내놔도 꿇리지 않는다. 8단 자동 변속기는 엔진에서 나오는 힘을 잘게 나누면서 2톤에 가까운 차체를 가볍게 움직인다. 밟는 대로 힘이 나오지만 조용하고 매끄럽게 돌아가는 회전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디젤엔진 탑재 승용차들에서 느낄 수 없는 휘발유 엔진 차량의 장점이다. 8단 자동변속기는 연비 효율을 높이는 데도 일조한다. K9 3.8은 복합연비 기준 휘발유 1리터로 9.3km를 달릴 수 있다. 큰 배기량을 생각하면 괜찮은 수준이다.
시내 주행에 나선 K9은 운전자를 최대한 편하게 해준다. 각종 경보장치와 헤드업디스플레이는 육중한 헤비급 선수에게 라이트급 선수가 지닌 눈썰미와 발놀림을 선사했다. 운전자 사각지대에 접근하는 다른 차량들을 끊임없이 감시하는 후측방 경보 시스템은 사이드미러와 헤드업디스플레이에 경고 메시지를 띄워 차선 변경 시 큰 덩치를 자신있게 움직일 수 있게 한다. 헤드업디스플레이는 다양한 정보를 운전자에 제공한다. 단순히 차량 주행속도만이 아니다. 후측방 차량 접근을 포함해 도로 주행 중 발생하는 경고사항은 물론, 내비게이션 길안내를 컬러로 보여준다. 도로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주행정보를 읽을 수 있는 게 안전 운전에 도움이 되는지는 사용해 보면 알 수 있다. 차선이탈 경보도 안전운전에 큰 도움을 준다. 차량이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고 차선을 침범하면 차선이탈 경보 시스템이 운전석 허벅지 쪽 시트를 진동시키고 헤드업디스플레이에 경고 메시지를 띄워 위험상황을 알려준다.
여유 있게 운전하다 도로정체에 걸렸다. 기어박스에 있는 오토홀딩 버튼을 눌러 기능을 활성화했다. 오토홀드는 정차 시 자동으로 브레이크가 잡히는 기능이다. 운전자가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도 차는 멈춰있다. 차를 움직이려면 가속페달을 밟으면 된다. 정말 편하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꽉 막힌 시내를 주행하면서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려놓는 수고를 더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K9은 한없이 조용하고 우아하게 움직인다. 연비 주행도 가능하다. 드라이브 셀렉트를 에코모드에 놓으면 계기반에 초록색으로 에코표시가 점등된다. 급가속을 해도 가속 페달에 저항이 느껴지면서 엔진 회전을 최대한 억제한다.
K9은 뒷좌석 사장님을 위한 편의장치로 가득하다. 흔히 말하듯 항공기 1등석 좌석처럼 편하다. 뒷좌석 승객이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게 원터치 릴렉스 모드도 준비했다. 버튼 하나로 조수석 시트를 최대한 앞으로 밀어내고 후석 시트를 눕힌다. 뒷자리 온도를 따로 조절할 수 있는 공조시스템과 전동시트,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따로 조작할 수 있는 건 기본이다.시내를 빠져 나와 고속도로에 올라서면서 얌전했던 K9의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워낙 힘이 좋아 가속페달을 밟는 대로 차가 나간다. 이 상태만으로도 잘나간다는 느낌이 충분하지만 K9은 또 한 번 변신한다. 드라이브 셀렉트를 스포츠모드로 변경한다. LCD 계기반 속에 반듯하게 서 있던 숫자들이 비스듬히 눕는다. 가속을 시작하면 최대한 변속 시기를 늦추면서 있는 힘을 다 짜낸다. 서스펜션이 단단해지면서 조금 물렁거리는 듯하던 차체를 다잡아준다.
고속 주행 중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발견했다. 제동성능이다. 잘 달리는 것만큼 잘서는 건 무척 중요하다. 출고된 뒤부터 험하게 굴린 시승차만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레이크가 밀렸다. 부드럽게 서는 것과 브레이크가 밀리면서 서는 것의 차이는 운전자가 몸으로 바로 느낄 수 있다. K9은 역시 거친 움직임으로 성냈을 때보단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몸놀림이 더 어울린다.
K9은 K시리즈의 결정판이다. 기아차의 욕망을 담아낸 작품이기도 하다. K5로 격찬을 받은 기아차는 여세를 몰아 K7을 내놨다. K7도 훌륭했지만 기아차는 여전히 목말랐다. 기아차는 회사를 대표하는 프리미엄 대형차의 부재를 늘 아쉬워했다. 현대차 에쿠스는 국내 대표 대형 세단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대형 수입차는 시장 점유율을 나날이 늘려가고 있다. 기아로서는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기아차는 4년 5개월 동안 5,200억 원을 쏟아부었다. 차체 길이 5미터가 넘는 체구에 넘치는 힘, 고급 수입차를 능가하는 편의사양을 지닌 K9은 그렇게 탄생했다.이 정도 가격에 이만한 성능을 갖춘 자동차는 흔하지 않다. K9은 ‘운전기사가 딸린 사장님 차’로 부족하지 않고, 젊은 사업가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운전하기에도 어색하지 않다. 세상에 나온 K9에 기아차가 거는 기대는 크다. 2013년형 K9이 그 기대를 얼마나 채워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