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조달이 어렵다 보니 자꾸 한국은행이 갖고 있는 보유외환에 눈길이 가네요." 시중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5일 기자와 만나 달러자금 확보가 생각만큼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토로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외환보유액의 은행지원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무리해서 달러를 조달할 수는 있지만 높은 가산금리가 붙어 불필요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차라리 한국은행으로부터 직접 차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냐는 것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이 지난 4일 보유외환의 활용을 놓고 각을 세우면서 논란이 금융계와 관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위기 때마다 보유외환을 은행에 직접 대출하는 방안이 거론되기는 했지만 근래 들어서는 이에 대한 필요성이 현 정권의 실세인 강 회장을 중심으로 금융계 고위 인사들 사이에 강하게 제기되고 글로벌 외환 시장도 녹록하지 않은 상황으로 이어지면서 정부의 방향 전환 여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보유외환의 활용 문제를 먼저 꺼낸 것은 금융지주회장들이었다. 지주회장들은 대체로 보유외환의 은행 대출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지난달 29일 창립 3주년 기념식에서 "유럽계 은행보다 위험 요소가 낮은 국내 시중은행이 외국은행으로부터 더 많은 금리를 주고 외화를 빌려와야 하는 형편인데 정부가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보유외환을 시중은행에 일부 맡겨 은행들이 달러 운용의 여유를 가지도록 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금융계의 한 고위 관계자도 "국내 은행은 200bp(1bp=0.01%포인트) 정도의 가산금리를 주고 대출을 받아오는데 차라리 이를 한국은행에 주고 달러를 확보하면 보유외환을 활용할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도 수익을 올릴 수 있어 서로 좋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강 회장이 4일 국감에서 "외환보유액 3,000억달러는 높은 수준"이라면서 "500억~600억달러가량을 은행과 커미티드라인(마이너스통장 성격의 단기 외화 차입) 계약을 맺어 달러대출을 해야 한다"고 밝힌 것은 금융계 인사들의 '욕구'에 점을 찍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간부회의에서 "외환보유고는 '최후의 보루(last resort)'로 금융시스템 붕괴 우려 등 급박한 시기에 대비해 마련한 것이다. 지금 같은 예측된 위기 상황에서는 금융회사들이 자체적인 달러 확보 노력을 먼저 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도 "은행의 바람대로 보유외환을 대출해줄 경우 외국에서는 '정말로 한국의 은행들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 상황은 2008년보다 훨씬 낫다"는 평가도 했다. 시중은행의 외화유동성도 2008년에 비해 월등히 개선돼 있고 달러도 석달치 운용할 정도는 쌓아 놓은 만큼 보유외환을 활용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2008년의 경우 한국은행은 달러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경쟁입찰방식 스와프 거래를 통해 67억달러를 공급했고 중소기업에는 수출환어음을 담보로 100억 달러의 외화를 대출했다. 한은이나 재정부도 입장은 비슷하다. 한은의 고위 관계자는 "강만수 회장의 제안은 개인적인 아이디어"라며 "현재 이런 방안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신제윤 기획재정부 차관 역시 "금융회사의 외화차입 비용이 높은 만큼 보유외환을 활용하자는 제안이 있는데 민간 자율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현 단계에서는 검토 대상이 아니다"고 밝혔다. 민간에서도 조금은 다른 목소리가 남아 있다.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은 "한은이 외환보유고를 은행에 대출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시중은행의 국제 담당 임원은 "국제금융시장이 어지러울수록 보유외환의 활용을 둘러싼 논란은 거세질 것"이라며 "차제에 이 문제를 제대로 토론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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