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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4월 14일] 섣부른 의료서비스 산업화論

지난 1912년 영국이 의료보험을 도입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지속된 보어전쟁의 경험 때문이었다. 보어전쟁으로 영국에서 처음 징병제가 도입됐는데 징집 대상자의 무려 40%가 신체허약과 결함으로 군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은 것이다. 군복무도 못할 정도로 허약한 ‘3등 국민’으로는 ‘1등 제국’을 유지해나갈 수 없다는 위기감이 영국 지도자들을 엄습했고 그 대책의 일환으로 의료보험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975년에 실시된 전국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40%가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의 평균수명은 선진국의 3분의2 수준에 불과했고 영아사망률은 선진국의 곱절에 달했다. 1977년에 처음 도입돼 1989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된 의료보험은 의료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과거에는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던 사람들이 병원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게 됐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바로 이 사람들이 밤낮없이 일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의료 부문이 국력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경로라고 강조하는 의견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의료서비스를 산업으로 육성하자’는 의료서비스 산업화론이 그것이다. 의료기관 당연지정제를 폐지해서 건강보험 환자를 거부할 수 있는 병원을 허용하고 영리의료법인을 허용해 병원도 주식회사처럼 운영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민간의료보험 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도록 건강보험의 진료 정보를 민간보험회사에게 제공하고 민간의료보험상품에 대한 세제혜택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환경이 조성돼야 첨단의학기술 발전도 촉진되고 의료 부문의 일자리도 늘어나며 국내 환자의 해외유출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료서비스 산업화론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의료서비스 산업화론의 요지는 ‘의료서비스로 돈을 벌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 부유한 외국 환자를 유치해서 달러를 벌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의료서비스 산업화로 우리 국민과 기업이 더 많은 비용을 떠안게 된다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의료서비스 산업화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미국의 예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4년 8월19일자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경제회복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고용증가가 부진한 주된 이유가 급속히 치솟고 있는 민간의료보험료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그동안 회사의 매출은 크게 늘었지만 의료보험료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미국의 한 최고경영자(CEO)의 푸념을 전하고 있다. 2005년 제너럴모터스의 정크본드 추락에 대해서도 종업원에 대한 과다한 연금과 의료비용 부담이 수익성을 악화시킨 주된 요인이라는 진단이 공통적으로 제기됐다. 최근 미국에서 민간의료보험을 둘러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이해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의료서비스 산업화가 고용을 촉진한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가 중 병원의 1개 병상당 고용자 수가 가장 많은 국가는 의료서비스 산업화와 전혀 상관없는 의료체계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의 병원 대부분은 국가 소유이고 개업의사도 준공무원 신분이다. 이런 영국에서 병상당 고용자 수가 가장 많은 이유는 환자 간병과 간호를 병원에 소속된 간호사와 간병인이 전적으로 담당하기 때문이다. 병상당 고용자 수가 우리나라보다 몇 곱절 되는 다른 여러 국가들의 사정도 매일반이다. 우리나라처럼 환자 간병과 간호를 보호자와 가족이 담당하는 한 아무리 주식회사 병원을 만들어도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난 2005년 기준으로 3만여개 일반 병상이 과잉 공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병원의 평균 병상 이용률이 OECD 평균보다 10%가량 낮은 65% 수준에 불과하다. 혁신의료기술개발은 지속적으로 장려돼야 하며 일부 계층에게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고급의료에 대한 서비스 욕구도 충족돼야 한다. 그러나 의료서비스 산업화가 기업과 일반 국민의 의료비용 부담을 덩달아 늘리는 결과를 야기해서는 곤란하다. 일반 국민의 의료접근성이 악화되고 미국처럼 의료비용 때문에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약화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의료서비스 산업화를 추진하더라도 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선별적이고 제한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지난 3월10일 기획재정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는 무차별적이고 매우 적극적인 형태로 의료서비스 산업화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건강을 잃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료 본연의 존재이유는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다. 의료 부문이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가장 확실하게 기여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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