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때 한 대기업은 현금 150억원이 담긴 종이박스 63개를 트럭에 담아 한나라당에 전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다. 1만원권은 통상 사과상자에 신권으로 2억4,000만원, 라면상자에는 1억2,000만원을 넣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007가방은 1억원까지 가능하다. 이를 단순 환산하면 5만원권은 사과상자에 12억원, 라면상자에 6억원, 007가방에 5억원까지 담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인터넷 불법 도박사이트를 통해 거액을 벌어들인 범인이 마늘밭에 5만원권 뭉칫돈을 숨겨둔 사실이 드러나면서 5만원권의 행방을 두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일각에서는 5만원권의 부작용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5만원권이 수사기관의 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 특히 불법 상속ㆍ증여나 정치권 로비자금으로 사용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도 적지 않다. 5만원권이 위기에 처한 셈이다. 5만원권의 위기이자 미스터리는 2009년 6월 첫 발행된 5만원권 유통액이 1년9개월여 만에 1만원권을 넘어섰는데 정작 일반시민들은 쉽게 만질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다. 3월 초 기준 5만원권 유통잔액은 20조1,000억원가량으로 1만원권 20조700억원을 웃돈다. 장수로는 4억215만장으로 우리나라 인구를 5,000만명으로 가정할 때 1인당 8장 이상을 지갑에 갖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지갑에 5만원권을 넣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5만원권이 불법 용도로 쓰이거나 고액자산가의 장롱에 박혀 시중에서 퇴장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5만원권이 화폐의 일차적 용도인 교환수단이 아니라 가치저장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논란이 지속되자 한은도 5만원권 행방 찾기에 나섰지만 현금의 특성상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다. 한은은 일단 5만원권이 도매시장이나 경매시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지방 상인들이 의류 등을 차떼기로 거래하는 동대문이나 남대문의 경우 대부분 현찰로 거래한다"며 "과거에는 이곳에서 10만원짜리 수표가 주로 사용됐지만 최근 5만원권으로 결제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시장이나 꽃시장 등 경매시장이나 강원랜드 등 도박장, 경마장 등에서도 5만원권이 상당수 유통된다고 한은은 보고 있다. 한은은 실제로 5만원권이 일부 불법적인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5만원권의 효용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1만원권이 처음 발생된 1973년에도 불법 로비자금으로 사용될 수 있다며 반대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으나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1만원권만으로 화폐수요에 대응하기 힘들다는 게 한은의 주장이다. 이흥모 한은 발권국장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속도에 비해 5만원권 발행은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다"며 "불법적인 용도로 사용된 몇몇 사례만으로 5만원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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