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최주현(48ㆍ가명)씨는 최근 비뇨기계 장애로 치료를 받았다. 그는 A손해보험사 통합보험에 가입했던 터라 보험사에 치료비를 요구했다. 하지만 보험사 측은 통원의료비를 보상해줄 수 없다고 했다. 최씨는 "왜 보상이 안 되느냐"고 따졌지만 보험사는 약관을 살펴보라고 했다.
약관에는 통원의료비 보상 제외항목에 '비뇨기계 장애' '직장 또는 항문 질환' 등이 들어가 있었다. 최씨는 "400쪽이 넘는 약관을 일일이 어떻게 다 읽어보느냐"며 "설계사가 다 보상된다고 했고 예외사례는 제대로 못 들었다"고 말했다.
보험사를 포함한 금융사의 약관은 소비자들에게 어렵기만 하다. 분량이 수백쪽이나 돼 이를 다 따져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융사 약관용어에는 한자가 많고 내용도 전문적이어서 상당수 고객들은 이해조차 힘든 게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복잡한 금융사 약관이 소비자와의 갑을 관계를 더 단단하게 하고 있어 핵심만 추린 요약본이라도 만들어 고객들이 최소한의 사항은 알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불명확한 약관…한자용어 수두룩=약관은 고객과 금융사의 약속이다. 쉽게 말하면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그런데 금융사 약관은 은행이나 보험사에 유리하도록 만들어져 있고 전문용어나 한자를 남발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금융문맹'을 만든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은행 여신약관이다. B은행의 가계용 여신거래 기본약관에는 '기한 전의 채무변제의무' 항목이 있다. 대출기간이 끝나기 전에 빚을 갚아야 하는 경우라고 보면 되는데 당장 일반인들은 이해가 쉽지 않다. 게다가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은행의 채권보전에 현저한 위험이 예상될 경우' 대출회수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은행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연체이자율도 제멋대로 돼 있다. C은행 기업대출용 약관의 지연배상금 항목에는 '금융사정의 변화 그 밖에 상당한 사유로 인하여 법령에 의하여 허용되는 한도 내에서 율을 변경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연체이자율에 대해 은행권은 연 10%대 이상의 금리를 물린다. 하지만 이 조항대로라면 언제든지 은행 사정에 따라 법적 최고금리 한도인 연 39%까지 매길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내용은 대출시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금융감독원도 최근 은행과 2금융권의 불공정 약관을 손보고 있다. 금감원은 은행이 대출상환을 위해 예금을 받아가는 상계권 행사시 예금금리를 낮게 주는 것을 바로잡았다. 원리금 연체횟수 누적을 이유로 기업대출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역시 손질했다.
보험사의 약관은 읽는 것 자체가 장벽이다. 보통 보험사 주력상품의 약관은 300~400쪽에 달한다. 질병에 따라 보험금을 주는 상품들의 경우 웬만해서는 어떤 병이 해당되고 어떤 것은 제외되는지 약관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
D보험사의 CI통합보험 가운데 보험금 지급과 관련된 약관의 질병 대상 설명 부분을 보자. '행동양식 불명 또는 미상의 신생물'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6차 개정 한국표준질병ㆍ사인분류(통계청 고시) 중 해당하는 것을 적었다. 이를 보면 '중이, 호흡기관, 흉곽내 기관의 행동양식 불명 또는 미상의 신생물(분류번호 D38)'이나 '수막의 행동양식 불명 또는 미상의 신생물(분류번호 D42)' 등을 예로 들었는데 일반인들은 읽기조차 힘들다. 예외 사안으로는 '만성 골수증식 질환 등(D47.1)' '본태성 혈소판 증가증 등(D47.3)' '골수섬유증 등(D47.4)' '만성 호산구성 백혈병(D47.5)' 같은 사례가 나온다. 보험사에 근무하는 이들조차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이 같은 예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금융감독 당국 관계자들조차 보험 등에 가입할 때 약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다. 자연스레 금융사 입장에서 약관이 작성되고 고객들은 사후에 피해만 보게 된다. "약관에 있지 않느냐"를 금융사들이 마음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보험사들이 툭하면 '가입 전 고지의무 위반' 등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핵심 요약본 필요=금융사의 암호문 약관은 민원으로 이어진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은행ㆍ비은행의 민원은 4만2,791건이었고 보험은 4만8,471건에 달했다. 약관이 어렵고 양이 방대한 보험 분야에서 특히 민원이 많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약관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약관 핵심 요약본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약관 내용은 다 중요하지만 이 중에서도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을 따로 모아 고객들이 반드시 읽어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민원이 계속되거나 고객과 금융사 사이에 다툼이 많은 약관 조항을 집중적으로 담아 고객들의 최소한의 이해를 돕자는 의미다. 금융교육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금융사 약관은 어느 정도 전문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약관 바로 읽기 같은 교육을 늘려야 한다는 얘기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보상받는 병의 범위 등 약관의 핵심 사항을 알기 쉽게 한 장 정도로 요약해 제공하면 시장의 불만이나 민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약관과 관련해 반복적으로 나오는 민원 부분을 모아 요약본만 만들어도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