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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의 일도 많은데 서울에 답장을 보내야 할 편지가 너무 많아요. 한국 식물에 대한 문의가 세계적으로 쇄도해 정신이 없군요. (중략) 이렇게 할 일이 많으니 낮이나 밤이나 눈코 뜰새 없이 바빠요. 그렇지만 어머니! 저는 이 일들이 너무 좋아요."
이 글은 천리포수목원을 일군 민병갈(칼 페리스 밀러) 박사가 그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일부다. 한때는 척박한 모래땅이었던 천리포수목원이 세계적으로 학술적 가치를 인정 받는 수목원 중 하나가 됐다. 관광 측면에서는 태안반도라는 캔버스를 마무리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이 산수화에 방점을 찍은 이가 벽안의 한국인이다. 왜 미국인이 서해의 외딴 구석 태안까지 찾아와 세계적으로 이름난 수목원을 가꾸게 됐을까. 이번주에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해 귀화한 미국인 민병갈 선생이 이뤄낸 천리포수목원으로 나들이를 떠나본다.
천리포수목원은 쌀쌀해진 날씨에도 빽빽한 나무들 때문에 여름의 밀림을 연상시켰다. 계절이 늦가을이라는 것은 나무에 달린 잎의 색깔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래밭이었던 태안의 해변가가 이렇게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변한 것은 순전히 한 사람의 열정 덕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웨스트피츠턴에서 출생한 민 박사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지난 1945년. 그는 미 24군단 정보장교로 한국에 처음 발을 디뎠다. 전생에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운명적으로 한국을 사랑하게 된 민 박사는 1962년 사재를 털어 천리포수목원 부지를 매입했다.
그리고 1970년에 마침내 그는 수목원 조성을 위한 첫삽을 뜨고 식재를 시작했다. 민 박사는 이후 40년간 척박한 태안 바닷가에 나무를 심는 작업을 이어가며 천리포수목원을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변모시켰다.
미군 장교였던 그는 애초에 식물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다. 그저 나무가 좋아 시작한 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에서도 인정받는 나무 전문가가 됐다.
민 박사는 자신을 위해서는 단돈 10원 한장 허투루 쓰지 않는다. 그의 검약은 지나치다 못해 궁상에 가까웠다. 그의 운전기사가 누추한 몰골을 보다 못해 자기 월급으로 양복을 사서 입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무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국제 나무경매시장에 희귀한 나무가 나오면 그는 아낌없이 베팅을 해 나무 가격을 올리는 주범이라는 지탄을 받을 정도였다. 지금 수목원에서 볼 수 있는 나무의 일부도 민 박사의 그 같은 절약과 투자의 결과물인 셈이다.
그런 민 박사의 열정 덕분에 천리포수목원은 국내 최초의 민간수목원이라는 이정표를 세웠고 자생식물을 포함해 전세계 60여개국에서 들여온 1만4,000여종의 식물종을 보유한 국내 최대 수목원으로 우뚝 섰다. 2000년에는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 인증을 받기도 했다.
지금 천리포수목원의 색깔은 여름ㆍ가을ㆍ겨울로 채색돼 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 단풍이 짙게 들어 꽃보다 눈부신 나무, 아직도 짙푸른 잎사귀를 달고 있는 상록수들이 종을 따지지 않고 어우러져 자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천리포수목원은 설립 이후 40년간 연구목적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비개방 수목원이었다.
하지만 설립자의 나무사랑 정신을 알리고 계승하자는 취지로 총 7개의 관리지역 중 첫번째 정원인 밀러가든을 2009년 3월부터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후 밀러가든은 연 2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받으면서 민 박사의 나무사랑을 전하고 있다.
늦가을을 보내고 겨울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밀러가든의 나무들을 구경하면서 최수진 천리포수목원 홍보팀장을 따라 수목원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최 팀장은 나무들을 가리키며 "나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사람이 하는 어떤 디자인도 자연과 나무가 연출하는 디자인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나무를 올려다보니 과연 정형과 비정형, 규칙과 불규칙이 어우러진 나뭇잎의 배열이 기자의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최 팀장은 "수많은 나무들을 친구로 뒀던 민 박사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며 "민 박사는 자신이 만일 결혼했더라면 천리포수목원을 일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나무에 대한 애정이 깊은 분이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그는 2002년 4월 숨을 거두기 전 "나를 수목원에 매장하지 말고 무덤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나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하지만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수목원 관계자들이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그가 좋아하던 나무 옆에 흉상을 설치하고 유골을 묻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아버지 같은 민 박사의 자취를 보듬고 지키려는 듯 묘지 주위의 나무들은 민 박사의 묘 주위를 방사형으로 에워싸며 서해의 낙조를 받아내고 있었다. /천리포=글ㆍ사진
여행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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