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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신년기획] 위기 딛고 새로운 비상 함께 할 100년은 더 높이…

■ 서울경제가 걸어온 길<br>경제 저널리즘 시대 열고 정책 결정·여론 형성 주도<br>박 前대통령 신년 단독 인터뷰… 국민과 경제문제 소통 창구로<br>복간이후 더 많은 노력 경주… 기업문화·과기발전에도 앞장


새해 아침을 여는 서울경제의 감회는 남다르다. 창간 5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서울경제가 지나온 격동의 세월 반세기는 대한민국 경제가 그려온 경제 발전의 궤적과 일치한다. 처음부터 그랬다. 1960년 8월1일 서울경제의 창간은 전쟁의 상흔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혼란을 벗어나 나라를 살찌우기 위한 근본부터 제대로 살펴보자는 시대적 요구의 산물이었다. 국민경제 발전의 견인차를 자임하며 창간한 서울경제가 지나온 길을 시대별로 살펴본다. <창간 전후와 경제개발계획> 1960년은 불안하고 어수선한 해였다. 4ㆍ19혁명과 자유당 정권의 붕괴, 민주당의 집권과 분열로 정치가 불안정했다. 이에 기업인과 대학 교수 등이 1947년 모여서 만든 서울경제클럽은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경제 저널리즘이 등장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 1960년 8월1일자로 서울경제신문을 세상에 내놓았다. 서울경제신문은 바로 인기를 끌었다.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관련서적은 물론 마땅한 교과서마저 없던 시절에 다양하고 정확한 기사로 믿음을 줬기 때문이다. 특히 창간호부터 100회분이 연달아 연재된 '경제 백서'시리즈는 당시 주력 산업이며 수출업종이었던 광업에서부터 농업, 금융, 제조업까지 한국경제의 실태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개선방향을 제시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경고도 잊지 않았다. '물가 15% 앙등, 생산 38% 위축'이라는 부제가 붙어 '경제 9월 위기, 갈수록 심각화'라는 제하로 나간 창간호 머리기사는 '새로운 정부가 정신차리고 경제에 힘쓰라'는 주문이었다. 서울경제는 창간사에서도 '미국으로부터 해마다 3억 달러의 원조를 받으면서도 마침 경제부처인 부흥부(경제기획원의 전신) 내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했으나 '경제개발계획의 원조가 소련이라는 데, 원수들을 왜 뒤따라 하냐'는 질책을 받고 책상으로 들어갔던 중장기 경제개발계획안이 다시 빛을 봤다. 장면 정권은 '1962년부터 1966년까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 연평균 5.6%의 성장을 이루겠다는 부흥부의 계획을 1961년 5월 발표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5.16 군사정변에 막혔기 때문이다. 서울경제의 창간 무렵, 한국 경제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1950년대 말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가능성이 엿보였다고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79달러.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국민들의 최대 관심도 먹고 사는 데 있었다. 서울경제에도 미곡과 잡곡, 설탕과 밀가루, 백포 등의 일일 가격 동향을 담은 물가표가 5단 통(광고를 포함한 지면의 3분의 1 정도) 크기로 실렸다. 반면 투자 지표는 한 줄로도 충분했다. 주식 종목수라야 은행과 광업회사 등 달랑 17개. 시세표도 필요 없이 1단 속에 갇혔다. 자본시장이 걸음마 단계에도 접어들지 못하던 시대였다. <1960~1970년대 고도성장기> 장면 정부가 추진하려고 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군정을 거치며 살아나고 더욱 다듬어져 1961년 발표돼 이듬해부터 적용되며 고도성장의 견인차 노릇을 해냈다. 제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료되기 직전인 1980년 우리 경제는 20년 전보다 32배나 커졌다. 1인당 국민소득도 21배 올랐다. 서울경제도 이 때 황금기를 보냈다. 다른 경제신문이 나타났으나 독보적인 경제신문으로 자리잡아 정책 결정과 여론 형성을 주도했다. 1966년 신년호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는 당시 서울경제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연초에는 대통령의 신년 공동기자회견이라는 관행을 깨고 박 대통령은 서울경제와 단독 신년인터뷰를 통해 경제철학에서 물가와 고용, 중소기업 문제, 소득 수준에 대한 생각을 밝혔었다. 이는 경제학자나 관료 뿐 아니라 국정의 최고 책임자까지 서울경제을 국민과 경제 문제를 소통하는 창구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서울경제가 대통령까지 인정할 수 있는 매체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매일 같이 1면의 측면에 실리는 정책 분석 기사가 정확하다고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경제교실, 재계회고 등 읽을 거리가 풍부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0년대 초중반까지는 국내 최고의 경제 엘리트들이 모였던 한국은행 조사부의 중간 실무자급 인력과 경제부처 과장급들이 집필한 '경제 교실'은 고시와 입사 시험 등 각종 시험을 치르는 대학생들의 필독 연재물로 각광받았다. 경제교실 시리즈는 책으로 나올 때 마다 3~4일만에 초판 매진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전직 경제부처 장관, 은행장, 재벌의 총수들이 번갈아 가며 집필한 '재계회고'시리즈는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한국 경제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 칼럼으로 명성을 떨쳤다. 1978년 서울경제 미주판이 발행된 것도 이 같은 수요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을 비롯한 재벌 총수들의 이야기는 국내 경영인들에게 지침이 됐을 뿐 아니라 다른 언론사들을 자극해 한동안 '회고 시리즈'가 유행처럼 잇따랐다. 1976년부터 시작된 '월례 경제토론회'도 가장 권위 있는 토론 마당으로 이름 날렸다. 은행장들과 기업 최고경영자(CEO), 고위급 관료, 원로급 학자들이 참여한 '월례 경제토론회'는 국내에 생산적인 토론 문화를 퍼뜨리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강제 폐간과 북간, 정상을 향한 행진> 그러나 명사들의 토론회도 1980년 10월의 58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서울경제이 총칼을 앞세운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기 때문이다. 경제지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던 서울경제을 없앤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항변도 신군부의 협박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각 언론사마다 계열사를 하나씩 없앤다는 방침을 세운 신군부는 당시 한국일보 그룹이었던 '일간 스포츠는 1981년 미스코리아 서울 대회가 예정돼 있는 마당에 연예ㆍ스포츠를 다루는 신문은 대상에 올릴 수 없으니, 서울경제를 폐간할 수 없다면 한국일보를 없애라'며 한국일보 장강재 회장을 국군보안부대에 감금하고 포기 각서를 쓰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며 협박했다. 결국 서울경제는 1980년 11월 25일,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고 말았다. 창간된지 20년 3개월25일 만이다. 서울경제의 모회사인 한국일보사는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재산상 손해를 보상받기 위해 90년 11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액 938억원중 1차로 100억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으나 '시효가 지났기에 소송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았다. 5공 치하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감안하면 시효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한국일보의 주장도 묵살되고 피해 보상이 막힌 상태다. 서울경제이 국가의 강압으로 폐간되던 순간 종합주가지수는 136.7포인트. 1980년의 국내총생산은 643억 달러였다. 서울경제는 6.29선언과 민주화로 강압이 사라진 뒤 서둘러 복간했다. 재창간한다는 뜻에서 창간기념일(8월1일)에 맞춘 1988년의 복간 당일 종합주가지수는 697.51포인트. 강제 폐간 당시보다 5배 이상 올랐다. 같은 기간 동안 3배 많아진 국내총생산보다 훨씬 빠르게 주식시장이 성장하며 증권 대중화가 이뤄지고 있던 시기에 서울경제는 손발이 묶이고 재갈에 물렸던 셈이다. 복간 이후 서울경제는 '국민경제의 양심적 파수꾼이 되겠습니다'라는 다짐 아래 주식면 강화, 주식 시황의 전문화, 다양한 자매지 발행, 새로운 독자 서비스 개발 등에 매진하고 있다. 복간 이후 서울경제은 한국건축문화 대상과 이달의 과학자상, 증시 대동제, 기업인을 위한 송년 음악회 등 지면 제작 이외의 기업문화 및 과학발전 분위기 조성에도 앞장서고 있으나 아직까지 옛 명성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점도 사실이다.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서울경제의 지나온 궤적은 우리 경제와 비슷하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침묵의 시기마저도 서울경제는 시대와 아픔을 함께 나눴다. 우리 경제도 1980년대의 3저 호황 이후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다. 앞으로도 비슷한 궤적을 그릴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창간 이래 대한민국 경제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해온 서울경제는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서울경제의 순항과 발전이 나라 경제의 중흥과 직결된다는 생각 아래 지나온 세월 쏟았던 모든 노력 이상의 노력을 쏟을 것으로 다짐하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국 경제호'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서울경제가 새롭게 비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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