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대 후반. 새로운 도전이 가능할까. 프랑수아 케네(Francois Quesnay)를 보면 그렇다. 중농학파를 창시하고 ‘경제표(Tableau economique)’를 고안한 케네가 경제 공부를 시작한 게 50대 중후반이다. 1694년 6월4일, 파리 근교 농가에서 태어난 케네의 일생을 지배한 것은 순환론. 의대생 시절부터 심취했던 윌리엄 하비의 혈액순환론은 의사로서의 성공은 물론 경제학자로 변신하는 바탕으로 작용했다. 국왕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던 퐁파르트 부인의 주치의로 지정된 케네는 황태자의 천연두를 치료해 어의 자리까지 꿰찼다. 나이 56세 때다. 케네는 지위를 십분 활용, 베르사유 궁전의 거처를 지식인들이 드나드는 토론클럽으로 만들었다. 경제지식을 쌓은 케네는 1756년 디드로가 편찬한 ‘백과전서’에 ‘농부론’을, 이듬해에는 ‘곡물론’을 올렸다. 환갑을 넘어 62세에 경제학자로 데뷔한 셈이다. 케네의 논문은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모았다. ‘상업과 공업은 상품의 순환과 변형에 불과하다. 농업만이 부를 창출한다’는 중농학파가 이렇게 생겨났다. 프랑스혁명의 주역인 미라보 남작이 ‘화폐ㆍ문자와 더불어 인류의 3대 발명품’이라고 극찬한 ‘경제표’도 이 시기에 나왔다. 부를 금이나 은 같은 고형물질로 생각하던 시절에 혈액순환론을 신봉한 의사답게 흐름으로 본 ‘경제표’는 한동안 잊혀졌지만 다시금 각광받고 있다. 1973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소련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 레온티에프는 수상소감에서 케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국민경제 각 부문간 연관성 분석의 원조가 250여년 전 케네라는 얘기다. 애덤 스미스에게도 케네의 흔적이 묻어 있다. 스미스의 유럽여행 당시 교분을 맺고 토론하며 건강을 돌봐준 사람이 바로 케네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