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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낯선 이미지는 타인의 시선을 잡아끌고 잠시나마 사색에 젖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시간을 거슬러 보이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가는 거장의 손길은 가속도의 시대에 느리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지 소리 없이 웅변한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현대 사진의 거장 히로시 스기모토(65)의 대규모 개인전 ‘히로시 스기모토: 사유하는 사진’을 오는 5일부터 내년 3월 23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에는 197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작가의 대표작 및 최근의 조각 설치, 영상을 포함하는 49점의 작품이 한자리에 선보인다. 특히 19세기 대형 카메라와 전통적 인화 방식에 대한 장인의 고집이 담긴 사진 작품을 감상하는 한편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작가의 예술혼을 만날 수 있다.
한순간을 포착하는 일반 촬영 방식이 아니라 장시간 개방된 셔터로 압축된 시간을 담아내 동양적 사유와 서양의 기하학적 추상이 결합된 독특한 색채를 확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극장(Theaters)’ 연작은 장시간 노출 기법을 사용해 미국의 1920~30년대 극장과 1950~60년대 시네마 홀, 자동차 극장을 찍은 연작이다. 그는 카메라 렌즈를 영화 상영 시간 내내 노출 시켰다. 그 결과 영화 스크린은 하얀색의 공백으로 반짝거리며 빛을 냈고, 어둠에 가려 있던 부수적 존재인 극장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역전되는 순간을 포착했다.
전세계 바다를 찾아다니며 찍은 추상적인 ‘바다풍경(Seascapes)’ 연작 또한 장시간 노출 기법을 사용한 작품으로, 시간성과 지역성을 상실한 몽환적인 바다 풍광을 담고 있다. 작가는 시간과 장소를 특정하는 요소를 모두 배제한 채 바다의 이미지를 궁극적 바다, 즉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태고의 바다’에 비유하고 있다. 1999년 독일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품으로 주문 제작된 ‘초상(Portraits)’ 연작은 재현의 역사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중 대표작인 헨리 8세와 여섯 부인들의 초상을 선보인다. 이 연작은 16세기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을 비롯한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를 토대로 19세기에 제작된 밀랍조각을 촬영한 작품이다. 작가는 한 장의 사진 속에 회화, 이를 기반으로 제작된 조각, 그리고 현대사진으로 이어지는 재현의 역사와 이에 수반되는 다양한 시간적 층위를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최근작 ‘번개 치는 들판’(Lightning Fields)은 40만 볼트의 전기봉을 금속판에 맞대는 위험한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번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초창기 사진의 발명가 W.H.F. 탈보트의 정전기와 전자기 유도 실험에서 영감을 받아 사진과 정전기를 결합한 새로운 이미지를 창안했다. 이번 전시에 새롭게 선보이는 ‘가속하는 불상(Accelerated Buddha)’은 사진으로 이뤄진 ‘부처의 바다(Sea of Buddhasㆍ1995)’, 3채널 영상인 ‘가속하는 불상(1997/2013)’, 17점의 조각 설치 ‘5원소(Five Elements)’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작업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소멸을 향해 속도를 내고 있는 현대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 의식의 기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염원을 드러낸다.
한편 작가는 2001년 사진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핫셀블라드상’ 수상, 2009년 영국 더타임스의 ‘1900년 이후 활동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 200명’ 선정 등 사진뿐 아니라 세계 미술계의 뜨거운 관심과 존경을 받고 있는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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