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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파워 코리아를 향해] 원전에서 결혼식을? 고리원전, 20년째 1,241쌍에 결혼공간 제공주민들과 불신해소…갈등 사후관리 모범사례 이재철 기자 humming@sed.co.kr 고리원자력발전본부 소식지에 실린‘고리웨딩홀’ 결혼식 정보. 본부는 고리 지역의 크고 작은 일상 정보를 담은 이 소식지를 매달 주민들에게 배포해 원자력을 둘러싼 지역갈등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관련기사 공공갈등, 타협의 소프트파워로 풀어야 고리원자력발전본부 소식지에 실린 ‘고리웨딩홀’ 결혼식 정보. 본부는 고리 지역의 크고 작은 일상 정보를 담은 이 소식지를 매달 주민들에게 배포해 원자력을 둘러싼 지역갈등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고리웨딩홀이 우리나라에서 최고예요.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에는 누나가 결혼하고 10년이 훌쩍 넘어 저도 지난해 12월 여기에서 예쁜 색시랑 식을 올렸습니다. 아직 장가 못간 43살 큰형님도 곧 여기에서 결혼해요.” 울산 토박이 이상길(37ㆍ울주군 서생면)씨는 구수한 입담으로 고리웨딩홀에 온 가족들이 큰 은혜를 입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12월23일 베트남 출신의 20살 신부 팜티프응씨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의 달콤함에 빠져 있다. 공공갈등의 대표사례였던 고리원전 지역에는 지금 소리 없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거대한 빙하와도 같았던 지역민들의 불신과 갈등이 ‘무료 결혼식’이라는 작은 주머니난로를 통해 녹고 있는 것이다. 고리웨딩홀은 이제 고리 지역에 없어서는 안될 ‘지역자산’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씨가 입이 닳도록 고마워하는 고리웨딩홀의 정식명칭은 ‘고리원자력 홍보전시관’. 고리원자력본부는 지난 88년부터 지역민들에게 이곳을 결혼식 공간으로 무료 제공하고 있다. 올해로 20년째를 맞는 동안 이곳에서 사랑을 약속한 신혼부부는 지난해 말 기준 무려 1,241쌍. 봄ㆍ가을 시즌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예약이 다 끝난다고 한다. 국내 어느 예식장보다 깊은 역사와 인기를 자랑하고 있는 셈이다. 이재원 고리원자력발전본부 홍보기술과장은 “발전소 반경 5㎞ 이내에 있는 3개 읍면을 대상으로 1년 이상 거주한 주민들에게 결혼식장을 제공하고 있다”며 “여기에 관광버스, 각종 예식 소모품을 모두 제공해 신랑ㆍ신부는 하객들을 위한 도시락이나 음식을 준비해오면 경제적 부담 없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행복하게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과장에 따르면 지난해는 더더욱 뜻깊은 일들도 많았다. 식을 올린 63쌍 중 베트남 출신 신부와 결혼한 건이 사상 처음으로 두 건이나 돼 고리본부 내부적으로도 큰 화제를 낳았다. 이상길씨를 포함, 이 두쌍에게는 고리본부가 특별히 준비한 가스레인지가 혼수품으로 전달됐다고 한다. “그래도 외국인 색시가 한국에 들어와 사는 건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더 열심히 살라는 의미에서 작은 선물을 마련한 것입니다.” 애써 “큰 일 아니다”며 이 과장은 손사래를 쳤지만 결과적으로 사소한 지역사회의 변화 하나도 놓치지 않은 공공기관의 갈등해소 노력은 ‘디테일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사실 그간 정부와 공공기관들은 지역갈등을 유발하는 ‘혐오’ 공공시설을 지을 때마다 으레 해당 지역에 양로원을 짓고 도로를 뚫고, 장학금과 지역발전기금을 제공하는 등 천편일률적 당근책을 써왔다. 하지만 고리본부는 이 같은 물질적 유인책보다 실질적으로 주민들이 ‘살 속 깊이’ 느낄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고 판단, ‘고리웨딩홀’이라는 새 접근법을 택했다. 진정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하고 여기에는 갈등의 상호 주체가 서로 ‘뒤섞여야’ 한다는 원칙이 이곳에 녹아 있다. 고리원자력 갈등의 한 이해당사자였던 새신랑 이씨는 “직원들이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이곳에 시설 안내하랴 결혼식 뒷바라지하랴 얼마나 힘들겠느냐”며 “이곳 주민 100명한테 다 물어서 고리원자력이 나쁘다고 대답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관전평을 내놓고 있다.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로 그토록 꺼리던 원자력발전소 터는 주민들이 매주 동네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내 집’처럼 드나드는 화합의 장소로 바뀌었다. 입력시간 : 2008/01/1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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