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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교수 시절부터 퇴임 이후에 이르기까지 서울경제와 각별한 관계를 맺어왔다. 전도 유망한 소장학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띄고 관직을 맡게 된 연유도 서울경제와 관련이 있다. 남 전 총리가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시기는 1966년 2월. 당시 한국의 재정ㆍ통화정책을 쥐락펴락하던 국제통화기금(IMF)이 금융정책의 무게추를 통화량(M1) 규제에서 본원통화(RB) 중심으로 바꾸도록 권고하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였는데 얼마 안 지나 파란이 일었다.
미국 저명 교수들이 IMF의 정책을 입안하기 전에 서강대 교수들이 작성한 '통화량 결정 요인과 통화정책의 방향'을 그대로 참고했다는 사실이 서울경제신문의 특종 보도를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서강대에 재직 중인 남덕우ㆍ이승윤ㆍ김병국 교수가 작성해 '서강대 리포트'라는 이름이 붙은 보고서의 발주자는 유솜(USOMㆍ미국대외원조처). 재무부 등 관련 부처는 이 보고서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으나 박 대통령은 국내 교수진이 유솜의 연구용역을 맡을 만큼 실력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는 '서강학파'가 1960년대 후반 이후 국내 경제개발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집단으로 등장하는 시발점이었다.
현직 부총리가 서울경제 기자의 안내역을 자처했던 일화도 있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재임하던 1976년 남 부총리는 파리에서 열린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 총회를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하려던 일정을 급히 바꿔 당시 서울경제의 출입기자이던 박병윤 기자를 단신으로 따라 나섰다. 기사 욕심이 많은 박 기자가 얀 틴베르헨(제1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교수와 접촉해 단독 인터뷰를 갖는다는 소식을 접하자 학자적 호승심이 발동한 것. 결국 인터뷰는 틴베르헨 교수와 남 부총리가 의견을 교환하고 박 기자가 질의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서울경제 창간 16주년 기념호에 인터뷰가 실린 후 부총리는 타사로부터 '서울경제 기자로 취직했느냐'는 힐난성 질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퇴임 후에도 서울경제와 남 전 총리는 끈끈한 관계를 이어갔다. 서울경제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는 물론 경제가 고비를 맞이할 때마다 긴급 기고를 통해 고견을 전했다. 특히 1997년 6월 '동남아 위기 징후가 남의 일이 아니며 우리도 외환을 많이 쌓아두는 게 좋겠다'는 충고를 보냈는데 5개월 뒤 외환위기가 닥쳤다. 환란 직후에는 서울경제가 주관한 금 모으기와 '경제 살리기 증권 갖기 저축운동본부'의 고문을 맡아 위기 극복에 기여했다.
평생 글쓰기를 좋아했던 남 전 총리는 마지막 글도 서울경제와의 인연으로 마쳤다. 노벨상 수상자 인터뷰로 우의가 깊어진 박병윤 기자(현 일자리방송 회장)가 최근 발간한 '바보야, 문제는 일자리야'에 남긴 추천사가 그가 생전에 직접 쓴 마지막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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