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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이야기(2)

다리는 길과 길을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요즘이야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들이 다니는 `에코 브리지`까지 등장했지만 옛날 길은 오로지 인마나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한 것이 고작이다. 개천(開川)도 역시 길을 잇기 위한 다리를 필요로 한다. 당시의 다리는 대개가 흙이나 나무로 만들어져 장마철에는 떠내려가기 일쑤다. 그래서 다리의 위치가 바뀌는 일이 허다한데 조선 초기부터 제자리를 굳게 지켜 온 유서 깊은 다리들도 적지 않다. 금천교(錦川橋), 광교(廣橋), 수표교(水標橋), 오간수교(五間水橋), 영도교(永渡橋) 등은 세월의 무상함과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직한 다리라고 아니할 수 없다. 개천에 처음 생긴 돌다리는 청계천 상류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부근 십자로에 만든 금천교인데 세 개의 아치형 수로를 가진 장중한 다리였으나 1928년 경복궁 서측 개천지류가 복개되면서 사라져버렸다. 한양의 내사산인 백악ㆍ인왕ㆍ낙타ㆍ목멱으로 둘러쳐진 철벽 성벽을 따라 놓인 오간수교 또한 구한말 동대문성벽을 헐리면서 철거됐다. 청계천 다리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연을 간직한 다리가 수표교(水標橋)라면 가장 많은 슬픔과 아픔을 간직한 다리가 바로 광교와 영도교가 아닌가 싶다. 조선초 흙교나 목교는 비가 조금만 와도 다리가 떠내려가 버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의정부 건의를 받은 태종은 석교(石橋)로 만들 것을 결심하고 그 재료를 찾던 중 계비 신덕왕후의 능에 시선이 머문다. 지금 정동에 자리한 신덕왕후의 능에는 왕후를 끔찍히 아끼던 태조(이성계)의 뜻에 따라 전국 명장인들이 만든 열두 신장석(神將石)이 있었다. 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태종은 급기야 이를 모두 뽑아 광교의 교각을 삼아버리게 하였으니 능침을 지켜야 할 신장석들은 하루아침에 뭇사람의 발에 밟히며 신음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복개된 하천 밑에서 음울한 목숨을 겨우 연명해 가고 있다. 오간수문을 빠져나가 처음 만나게 되는 영도교 역시 슬픈 아픔을 품고 있다.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해 영월로 귀양갈 때 송비(宋妃)와 이별했던 장소가 바로 이 다리다. 이마저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다리를 헐어 모자란 석재로 써버렸다 하니 그 한숨은 지금 어디에나 묻혀있는지…. 한 때는 한양 도성 크고 작은 하천에 여든 개가 넘는 다리들이 있었건만 유독 개천에 놓인 다리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뜻은 아마 우리들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진한 인연 때문이리라. 이제 그런 연을 바탕으로 서울시의 복원계획이 빛을 발하는 날 침울하게 갇혀있던 슬픈 역사가 활짝 열리고, 다시 밝은 빛으로 환생하여 분명 도심의 낭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리라. <최재범(서울시 행정2부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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