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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파기하는 사회
입력2003-11-16 00:00:00
수정
2003.11.16 00:00:00
`기록을 남기지 말아라`
국내 굴지의 A그룹은 최근 계열사들에게 세무회계등과 같은 대외적인 업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부나 기록을 제외한 나머지 개별적인 기록들은 모두 파기하라고 지시했다. A그룹은 심지어 대형 사업을 진행하면서 차곡차곡 누적시켰던 개개인의 노하우 기록마저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최근 정치비자금 제공과 회계장부 조작 등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강도를 더해가면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해프닝들이다.
“어쩔 수 없습니다. 기업들이 갖고있는 자료나 기록이란 것들이 항상 노하우만 담겨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자료나 기록은 어느 순간 기업의 발목을 잡는 불법 및 탈법 증거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A그룹 계열 건설업체 K 차장ㆍ41)
참여정부 출범이후 대한민국은 1년내내 기업들의 회계장부 조작과 정치비자금 파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와중에 SK그룹은 손길승 회장이 검찰수사권의 중심인물이 됐다. 최근엔 삼성, LG,현대차 등 주요 그룹 자금담당 임원들 모두가 검찰의 핵심 조사대상으로 거명되고 있다. 급기야 구본무 LG회장에 대해서도 출국금지 조치가 이뤄졌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자료나 기록을 파기하라는 지시는 사실 올해만의 일은 아닙니다. 짧게는 1년 단위로 길게는 3년 단위로 기업활동에 대한 외부의 눈길이 집중되면 그동안 갖고있던 노하우를 포함해 모든 자료나 기록을 주기적으로 없앱니다.”
최근 기업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K차장의 고해성사다. 그는 마치 바닷가 모래밭에 열심히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파도가 밀려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일본 도요타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은 30년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당시 그 문제를 놓고 조직원들이 어떤 고민을 했으며, 어떻게 풀어갔는가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기업 역사만큼의 노하우를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자신들의 자산으로 관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최근의 검찰 수사나 국세청 세무조사 등은 한국이 깨끗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기록파기를 권장하는 문화로 이어지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혹시 하루 끼니를 때우기 위해 1년 농사를 포기하는 것은 아닌가.
<김형기(산업부 차장) kk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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