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말 인기를 끌었던 ‘우상의 눈물’이라는 작품이 있다. ‘동행’으로도 유명한 작가 전상국의 소설이다. 배경은 도시의 어느 고등학교. 주인공은 임시 학급 대표를 맡은 경위로 실질적인 ‘권력자’ 최기표에게 폭력을 당한다. 그는 ‘재수파’라는 폭력 서클의 리더로 그 구성원들이 피를 뽑아 팔아서 생활비를 조달할 정도로 강력한 충성의 대상이었다. 거대한 폭력 앞에서 주인공은 반장으로서 무엇인가를 해 보겠다는 의지도 실현하지 못한 채 임형우라는 친구에게 자리를 넘겨 주고 만다. 마치 12·12 사태로 신군부라는 집단에 정권을 넘겼던 어느 전직 대통령처럼. 그런데 폭력에 의한 권력도 나름의 한계가 있었다. 합법적 권력을 쥔 자들이 새로운 전략을 짰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은 새로운 반장 임형우와 공모해 치밀한 기획을 만들어 내고 최기표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 내용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최기표의 사정을 미담으로 만들어 포장해 방송사에 보내는 것. 그렇게 되면 담임은 훌륭한 교육자로 표창을 받을 수 있고, 반장은 임기를 연장할 수 있으며, 최기표라는 폭력 서클의 리더가 양순해 질 수 있다는 고도의 계산이 숨어 있었다. 결국 기표와 친구들의 ‘매혈을 기반으로 한 우정’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를 도운 고교생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러자 최기표는 더 이상 강력한 학생 폭력배일 수 없었다. 미지의 세계 앞에서 담임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한 마리 양이 된 것이다. 정·재계에서 성금이 전달되고 최기표는 일종의 앵벌이가 되고 말았다. 결국 견디다 못한 최기표는 편지를 남기고 도망치는 듯한 결말로 소설이 마무리 된다.
1970년대의 소설 속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는 섬뜩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오늘날의 교실을 되돌아 봤다. 어느 학급이나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힘 깨나 쓰는 아이도 있는 법이다. 학생들 간에 건강한 긴장 상태가 조성되지 않으면 왕따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집단 따돌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아는 교사가 그 상황을 제대로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좀처럼 들어본 적이 없다. 제도적 권력에 의해 폭력을 주도한 학생을 징계하거나, 피해자를 하루빨리 전학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경우는 봤어도.
더욱 무서운 것은 소설 속 ‘담임’과 같은 사악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도 없다는 점이다. ‘기표의 이야기’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에 올려버리면 단순히 미디어 시청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대중들이 알게 될 것이다. 폭력마저도 어느 한쪽 면만을 부각해 자신들의 영달을 위한 아이템으로 이용하는 합법적 권력은 정말 무서운 존재다.
요즘 각계를 들썩이고 있는 국정 교과서 논쟁과 충암고 급식 사태 등은 초·중·고교가 앞으로도 제도에 의해 정당화된 권력의 장으로서 계속 군림할 것임을 시사한다. 일련의 교육 정책과 관련된 논란 속에서 학생들의 복지를 염려하는 전문가는 보기 드물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이 어떻게 쪼개어질까 염려하는 이해관계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체제가 만들어 낸 감수성 속에서 최기표 같은 폭력 학생, 담임 같은 교활한 선생, 임형우 같은 사악한 반장이 여전히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결국 힘이 세든 돈이 많든 약자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학생’ 모두가 잠재적 피해자인 걸까. 오늘의 현실이 이 지경이라면 교실 창살이 감옥의 그것과 다를 것이 과연 무엇인가.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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