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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눈먼 자들의 도시'

소설과 영화 속 ‘눈먼 자들의 도시’, 오늘날 우리 사회와 닮은 점이 너무 많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라는 작가의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작품이 있다. 줄리안 무어 주연의 영화로도 개봉된 적이 있다. 어느 날 리스본 한 복판에서 운전 중이었던 남자가 갑자기 실명한다. 그 뒤로 여러 사람들이 연이어 시력을 잃었다. 정부 당국은 이것을 ‘백색 실명’이라 이름짓고 전염병으로 선포했다. 환자들은 수용소에 격리됐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수용소 안에서 전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군인들의 온갖 도난, 성폭행, 살인 등이 자행됐다. 일련의 혼란은 수용소 내 폭동과 민란으로 퍼지고 리스본 전체가 아비지옥으로 변했다.

소설 속 결말은 어떤 구세주의 등장이나 극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다. 처음 발병했던 남자의 시력이 회복되면서 다른 사람들도 눈을 뜨게 되는 장면이 펼쳐진다. 실명 현상은 단순 전염병이 아니라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필연으로 이어진 사태였다. 이 사태는 자연 현상에 의한 비극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위기이기도 했다. 광기 어린 순간에 정부는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투명하게 공개하기보다는 환자들을 정신병동 안에 은폐하기 바빴다. 혼란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협력하기보다는 공포에 시달려 도망치는 데에만 집중했던 시민들의 태도도 문제였다.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시력을 잃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실상 이성적 판단력 자체를 상실한 모든 사람들이 ‘눈먼 자’들임을 시사한다.

부패하고 엽기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옥시의 가습기 살균용 약품 문제와 그에 협조한 몇몇 교수들, 화장품 제국을 일군 성공한 기업인의 로비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바야흐로 눈먼 자들에 휩싸인 사회다.



이 와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중적으로 얻어 맞을 타겟 한 두 사람을 찾고 있다. 어떤 부조리가 발생하는 데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을 사회 구조와 거악(巨惡)의 존재를 궁금해 하기는커녕 모두가 속 시원히 욕하고 돌을 던질 만한 샌드백이나 찾는 꼴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눈먼 자들의 도시’와 다를 게 무언가. 적절한 희생 제물 또는 공격 대상이 물색되면 그를 상대로 한 맹비난과 조리돌림이 진행된다. 그 사이 진짜 범인은 묘하게 상황을 피한 뒤 간악한 웃음을 짓고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절반만 해결된 셈이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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