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 등 한진해운 채권단이 처음 계획과는 달리 유동성 마련 방안 없이 자율협약을 한 달 연장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당초 이번주까지 한진해운으로부터 신규자금 계획을 받아 실현 가능성을 따져본 뒤 연장을 결정하겠다던 방침에서 물러선 것이다. 한진해운의 재정상태가 갈수록 나빠지고 있는데도 자구 규모를 둘러싼 채권단과 한진해운 사이의 줄다리기가 계속 이어지게 된 셈이다.
27일 금융당국과 채권단에 따르면 채권단은 한진해운이 용선료 인하와 선박금융 만기 연장 협상 개시를 근거로 한진해운 자율협약을 오는 9월4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한진해운이 앞으로 제출해야 할 유동성 규모도 1조2,000억원에서 용선료 27~28% 인하를 통해 5,000억원 줄일 수 있다는 한진해운의 주장을 받아들여 7,000억원으로 낮췄다. 7월 중으로 신규자금 마련 방안을 제출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법정관리도 가능하다는 ‘최후통첩’을 보냈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금융당국이나 채권단이 한진해운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채권단과 한진해운은 매일 만나 자금 마련 방안을 논의하고 있지만 뚜렷한 해법이나 진행 상황을 전달받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 계열사인 대한항공 자산유동화증권 발행을 통한 자금 중 일부를 투입하거나 비상장 자회사의 상장을 통한 자금 마련 방안을 거론하지만 정작 채권단이나 금융당국은 한진해운으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오히려 해운업을 담당하는 해양수산부에서 대한항공의 지원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다.
이에 대해 금융당국 관계자는 “한진해운 부족자금 규모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고 있다”면서 “시기별로 필요한 유동성 마련 계획을 세워오면 채권단이 업계 동향 등을 토대로 실제 가능한지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적으로 구조조정 중인 기업의 자금 방안을 검증할 때는 채권단이 실현 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시점보다 최소 6개월 전에는 자금을 마련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한진해운의 경우 시점은 고사하고 필요한 총 규모를 놓고 채권단과 한진해운 간 승강이를 벌이고 있다. 한진해운은 대한항공이 유상증자에 참여해 4,000억원까지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선박금융 만기 연장과 용선료 인하 협상을 놓고서도 당국과 채권단은 ‘한진해운이 보고하지 않아 모른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금융당국과 해수부 등 부처끼리의 공조도 쉽지 않은 분위기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한진해운 측이 채권단에 제대로 상황을 알리지 않고 바깥에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을 토대로 여론전을 펴고 있다”면서 “해외 선주나 금융기관과 협상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진해운 유동성 방안 마련이 지체되면서 위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미 용선료 때문에 한 차례 배를 억류당한 한진해운이 이번에는 터미널 사용료나 유류비 등을 연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 STX팬오션은 용선료와 유류비 대금을 내지 못해 선박 22척이 억류됐다가 채권단이 대금을 지급하면서 해제됐다. 유류비는 공급업체와 장기전속계약을 해 공급받기 때문에 연체된다고 해서 배를 억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선사들이 기름을 넣으면 석 달 뒤 기름값을 내야 하는데 선사의 재무상태가 좋지 않으면 90일까지 유예기간을 주기 때문이다. 다만 유예기간 이후에도 유류비를 내지 못한다면 법정관리에 해당할 만큼 재무상황이 나쁜 것으로 해석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한진해운 거래처들의 불만이 많지만 그동안 거래관계가 있어 섣불리 선박 억류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면서도 “한 곳이라도 나서면 나머지 업체들이 연쇄적으로 억류 등의 조치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배가 억류되면 운송에 차질을 빚으면서 운송계약을 맺은 국내 기업들이 생산 또는 수출에 차질을 빚는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임세원·김보리기자 why@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