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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녹둔도(鹿屯島)





조선 중기만 하더라도 두만강 유역 주민들은 여진족의 약탈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1586년 조선 조정은 변방의 상황이 심상찮다고 판단하고 이순신을 ‘조산만호’로 파견했다. 이듬해부터 두만강 하구에 있던 녹둔도(鹿屯島) 둔전관을 겸하게 했다. 1587년 어느 해보다 풍년이 든 녹둔도 들녘에서 추수를 하는 사이 여진족이 침입했다. 이로 인해 조선 병사 10여명이 전사하고 백성 160명이 끌려갔다. 뒤늦게 몇 안 되는 군사를 데리고 추격에 나선 이순신은 적장 3명을 죽이고 백성 60여명을 구출해 돌아왔다. 여진족의 침략이 있기 전에 이순신의 병력증원 요청을 묵살했던 북병사 이일은 전투 손실에 대한 책임을 이순신에게 덮어씌우고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만호직을 박탈하고 백의종군하는 선에서 징계를 마무리했다.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지 석달 만인 1588년 1월 이순신은 여진에 대한 보복전에 참여해 본거지를 초토화하고 추장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사로잡은 공을 인정받아 복직됐다. 이것이 이른바 ‘녹둔도 사건’이다.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에 있는 여의도 10배 크기의 섬이다. 한때 사차마도로 불렸으나 세종 때 육진을 개척하면서 녹둔도로 이름을 고치고 조선 영토로 편입했다. 이후 농민들은 배를 타고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조선 조정은 여진족 침입에 대비해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렀다. 녹둔도는 원래 섬이었지만 1800년 이후 강의 퇴적작용으로 쌓인 흙 때문에 러시아 연해주와 연결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에 따라 1860년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베이징조약이 체결될 때 러시아 영토로 규정돼버렸다. 고종황제는 1889년에야 이 사실을 알고 청나라에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후에도 1984년 북한이 소련과 국경문제에 대한 회담을 열었으나 해결을 보지 못했고 대한민국도 1990년 러시아에 섬의 반환을 요청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우리 정부가 이 녹둔도에 ‘이순신 장군 육군 유적지’를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남북 역사학자들이 공동 조사한 바에 따르면 녹둔도에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류와 토성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디 이 사업이 잘 진행돼 먼 훗날이라도 미수복 영토가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철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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