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지난해보다 20.4% 늘어난 1조7,000억원을 기초과학에 투자하고 오는 2022년에는 2조5,200억원으로 늘릴 계획이지만, 여건만 허락되면 빨리 당겨야 합니다.”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본지가 ‘다시 기초과학이다:대한민국 혁신성장 플랫폼’을 주제로 지난 14~16일 개최한 ‘서울포럼 2019’ 개막식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는 ‘기초과학 투자 현장선 체감 못한다’는 본지 5월13일자 1면 설문 기사를 화면에 띄운 뒤 “2조5,000억원도 연구개발(R&D) 예산의 10%가 채 되지 않을지 모르는데, 비중을 늘려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김두철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께 예산이 얼마냐고 하니 2,360억원이라고 한다. R&D 예산의 1%밖에 안 되는데 국가적으로 기초과학에 역량을 집중하지 않으면 노벨과학상은커녕 신과학시대 경제를 이끌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 장관과 손 대표는 미래 성장동력 확충을 위한 과학기술, 특히 응용·개발기술과 인력양성의 토대가 되는 기초과학을 튼튼히 하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여기서 얘기하는 기초과학(basic science)은 기초연구(basic research), 즉 생산품이나 프로세스를 염두에 둔 구체적인 응용이나 생산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현상의 근본 측면을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관찰하는 분야를 일컫는다.
국양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은 “우리가 기초과학과 기초연구를 혼용하는데 기초연구는 대학과 연구소의 기초과학, 단기응용이 전제되지 않은 공학연구, 의학·약학·농학·치의학·수의학의 발견연구까지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초연구의 예로 인공지능(AI)과 반도체의 근간인 응용수학, 원자력을 위시한 물리학, 옷이나 유기화학을 태동시킨 기초화학, 의학의 획기적 발견을 가져온 분자생물학, 현대 전자 산업을 태동시킨 재료과학·전자공학 등을 들었다. 그는 “미국에서 1929년 대공황 이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기초연구 투자를 늘려 신산업을 창출하고, 경제 활성화를 꾀하고, 인력을 키웠다”며 “개발의 큰 틀 안에서 기초·응용연구가 상호 작용해 상품이 나오는 모델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정부 R&D 예산에서 기초연구를 산정하는 방식과 그 비중은 얼마나 될까.
우선 산정기준을 보면 기초연구 통계를 산출할 때 연구책임자에게 기초연구·응용연구·개발연구를 기입하도록 해 자의성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2017년 기준으로 6만1,000개가 넘는 R&D 과제를 수행한 대학 교수나 정부 출연 연구기관, 기업이 재량껏 써낸 비중이어서 객관성이 떨어진다.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으로 통계의 신뢰성을 담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만 대략적인 기초연구 비중은 3분의1 선에 그친다. 과기정통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정부 R&D는 2017년 기준으로 19조3,927억원 중 장비와 시설 등을 제외한 13조7,152억원에서 기초연구는 33.5%, 응용연구는 19.1%, 개발연구는 47.4%였다. 그전에는 기초연구 비중이 2013년 30.3%, 2014년 30.9%, 2015년 32.3%, 2016년 32.5%로 3분의1에도 미치지 못했다. 선진국의 R&D 흐름을 좇는 패스트팔로어(fast follower)에서 벗어나 기초를 튼튼히 해 독창적·선도적 연구를 통해 퍼스트무버(first mover)로 나가자고 하는 화두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기관별로도 통계가 차이 나 한국연구재단이 과기정통부와 교육부의 기초연구 사업(개인연구·집단연구·이공학학술연구 기반 구축)을 대상으로 기초연구 투자 비중 추이를 분석한 결과 2013년 24%, 2014년 26.4%, 2015년 26.4%, 2016년 27.2%, 2017년 28.1%로 나타났다.
여기에 ‘기초연구비 비중 산정 매뉴얼’에 따른 기초연구비 비중의 경우 ‘순수 연구개발+연구기관 지원+복합활동 사업+국립대 교원 인건비’를 합쳐 2013년 34.1%, 2014년 36.3%, 2015년 38.4%, 2016년 38.9%, 2017년 40%로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기초연구 통계가 복잡하다 보니 정부는 앞으로 기초연구비 비중 산정 매뉴얼에 따른 통계는 내지 않기로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은주 과기정통부 과학기술정보과장은 “2017년에 정책목표치인 40%를 달성해 2018년 기준부터 더 이상 기초연구비 비중 산정 매뉴얼에 따른 통계는 뽑지 않기로 했다”며 “앞으로 과학기술 R&D 통계 중 유사 통계 등을 전반적으로 정비할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정병선 과기정통부 연구개발정책실장은 “연구자가 기초냐, 응용이냐, 개발연구냐를 직접 입력해야 해 자의적이고 오류도 많고 (예산 집행 전) 사전에 산정하기도 어렵다”며 “과기혁신본부에서 기초·응용·개발 꼬리를 달기는 하지만 사후 입력이라 그것도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신 과기정통부는 연구자가 제안하는 연구자 공모 기초연구비 통계를 강조하고 있다. 바로 유 장관이 서울포럼에서 언급한 기초과학 통계다. 문재인 정부는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비를 임기 첫해인 2017년 1조2,600억원에서 올해 1조7,000억원으로 늘린 데 이어 2022년까지 2조5,000억원으로 확대하기로 로드맵을 짰다. 기초연구비에서 차지하는 연구자 주도 방식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25.1~23.3% 수준(연구재단 통계)이었으나 문재인 정부에서는 크게 늘어나게 된다. 연구자 공모 기초연구비는 확실하게 기초연구 투자로 분류할 수 있고 연구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북돋울 수 있어 이 통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염한웅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은 “정부 출범 전 기초연구비 자체를 임기 중 두 배로 늘리자고 주장했으나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 사업을 두 배로 확대하는 것으로 정리됐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연구자 공모 기초연구비도 평가방식이 기존처럼 정량평가 위주로 진행되는 점은 개선과제로 꼽힌다. 정부 R&D 기획·선정·평가·보상 과정에서 연구자의 자율성·창의성을 되살릴 수 있는 프로세스가 구축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정부 R&D 연 20조원대 시대에 기초연구비가 확대되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연구자의 체감도가 아직 높지 않은 것도 숙제다. 본지가 이달 8~10일 대학·IBS·출연연·기업의 교수와 연구원 12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정부의 R&D 지원이 부족하다는 응답이 53.6%에 달했다. 연구자 스스로도 ‘정부 R&D 과제를 통해 논문과 특허는 많이 나오는데 질적으로 취약하다’는 데 80%가 동의했고 ‘대학과 출연연의 기술이전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데도 60%가 의견을 같이했다.
유 장관은 “단기 성과와 정량적 성과만을 지나치게 강조해 R&D 과제 성공률이 98.7%에 달한다”며 정부 R&D의 패러독스를 지적한 뒤 “연구자가 체감하는 기초연구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역설했다. 서은숙 미국 메릴랜드대 물리학과 교수는 “기초연구가 탄탄해야 응용·개발연구도 토대가 튼튼해진다”며 “과학에서 창의성을 키워야 새 방정식을 만들 수 있고 노벨상도 받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발달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 기초연구가 바로 응용·개발연구로 이어질 가능성도 커졌다. 페레츠 라비 이스라엘 테크니온공대 총장은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애플·IBM 등과의 협력, 의학·공학 융합연구, 도전정신·기업가정신 육성에 나서고 있다”고 소개했다.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은 “미국은 의학 등 기초연구에 대거 투자한 뒤 영향력 있는 논문을 내고 바이오벤처 창업으로 이어진다”며 “세계가 그 시약을 쓰는데 우리나라도 바이오과학에서 투자금의 30~40%는 미국으로 간다. 바로 기초연구가 응용·개발연구로 이어지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 kbgo@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