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한국시간) 여자골프 최고 대회인 US 여자오픈을 정복해 100만달러(약 11억9,000만원) 잭팟을 터뜨린 ‘슈퍼 루키’ 이정은(23·대방건설)은 지난 2017년에 US 여자오픈을 처음 나갔다. 당시 귀국 전 미국 아웃렛 매장에 들러 옷 다섯 벌을 샀다. 국내 투어 소속이던 그는 그때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대회 첫 출전이었고 미국땅을 밟은 것도 처음이었다. 기대 이상의 공동 5위 성적을 들고 돌아온 이정은은 “옷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어릴 때 입고 싶은 옷을 사 입지 못한 게 솔직히 아쉬웠다”고 털어놓았다.
이정은은 형편이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돈 많이 드는’ 골프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재능을 발견해 시작했지만 3~4년 뒤 그만뒀다. 외동딸을 골프 시키는 데 돈을 다 쓰는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골프채를 다시 잡은 것도 가족을 생각해서였다. 중3 때 진로를 고민하다가 ‘레슨프로가 돼서 돈 벌어야지’하는 생각으로 다시 연습장에 갔다. 골프로 돈 벌 생각만으로 독하게 연습했다. 퍼트 연습에만 하루 12시간씩 매달리기도 했다. 모르는 사이에 기량이 확 늘어 국가대표가 됐고 투어 프로까지 됐다.
이정은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대회는 2015년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였다. 개인·단체전 금메달 석권도 화제였지만 휠체어에 의지한 채 딸을 응원한 아버지 이정호씨 때문에 더 주목받았다. 덤프트럭 기사로 일하던 이씨는 이정은이 네 살 때 차량이 30m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큰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 장애를 갖게 됐다. 이씨는 장애인용 승합차를 직접 운전하면서 전담기사로 딸을 뒷바라지해왔다. 이정은은 “골프가 안 되고 너무 힘들 때 휠체어 탄 아버지 생각만 하면 정신이 든다. 골프에 집중하고 성적을 내는 게 효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프로가 돼 모은 상금으로 순천에 살던 부모님을 경기 용인으로 모셔왔고 아버지에게 새 전동 휠체어도 선물했다.
2년 연속 상금왕·최소타수상 수상 등으로 국내 무대를 평정하고 LPGA 퀄리파잉스쿨도 1위로 통과했지만 이정은은 미국 진출을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길었다. 장애인 탁구선수로 활약하는 아버지가 함께 미국생활을 하기에는 물리적 어려움이 많았고 어머니 주은진씨는 남편 곁을 지켜야 했다. 이후 부모님의 적극적인 권유 속에 미국행을 어렵게 결정한 이정은은 새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다. 밝은 금발로 염색하고 운동량을 늘려 국내에서의 다부진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했다.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국내에 남은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이정은의 부모는 이날 용인 집에서 TV 중계로 딸이 흘리는 감격의 눈물을 조용히 지켜봤다. 어머니 주씨는 통화에서 “3라운드 끝나고는 경기가 잘 안 풀려서 너무 힘들다고 연락이 왔었는데 이렇게 잘 해내 기특하고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주씨는 “그동안 경기력에 대한 불만은 있어도 미국생활이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잘 먹고 잘 자고 행복하다고 하는데 살이 너무 쪄 큰일”이라며 웃었다.
이정은은 우승 뒤 눈물이 터진 데 대해 “돈을 꼭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골프를 했다. 아마추어 시절이 생각나 눈물이 났다”고 했다. 과거 인터뷰에서 “서른까지만 골프 하고 싶다”고 했던 이정은은 “지금은 골프를 즐기고 있다. 오래오래 하고 싶다”고 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