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태평양의 오지 야프섬에서 ‘페이(fei)’라는 특이한 돌 화폐가 발견됐다. 외부와 고립된 이곳 경제시스템에서 통용되는 이 돌 화폐는 지름이 30㎝에서 360㎝에 이르며,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다. 원주민들은 무거운 돌 화폐 주고받으면서 거래를 성사시키지 않았다. 돌의 주인은 종종 바뀌었지만 페이의 위치가 이동되는 일은 드물었다. 야프섬의 화폐는 신용거래를 나타내는 증거물에 불과했다. 페이의 존재는 “화폐가 탄생한 것은 물물교환을 더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흔히 이야기되는 화폐의 기원에 대한 가설을 보기 좋게 배반한다.
신작 ‘돈’은 화폐의 핵심은 물물교환을 대체하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사회적 기술이고 신용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사용해 거래하면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보다 채권을 양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경제와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꿔놨다’고 말한다. 화폐 덕분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거래를 하게 됐고 사회적 이동이 가능해졌다. 화폐는 자유를 줬다. 동시에 화폐는 ‘금융적 의무’(부채)를 만들어내 안정성과 확실성도 보장했다.
책은 고대 문명과 그리스·로마의 역사, 중세 신흥 상인계급의 발흥과 은행의 탄생, 화폐정책·화폐 주조를 두고 벌어진 국왕과 의회의 줄다리기까지 짚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가 거쳐온 역사를 살펴본다. 단순히 역사의 나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현실을 분석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한다. 저자 펠릭스 마틴은 세계은행(WB)과 유럽안정 이니셔티브 싱크탱크에서 근무하다 현재는 런던에 위치한 금융사 라이언트러스트에서 근무 중이다.
저자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의 원인에 대해 ‘화폐를 잊은 경제학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금과 은이 유일한 화폐로 등장하면서 화폐 가치는 고정됐다. 특히 영국 철학자 존 로크의 화폐본위는 고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고화되면서 그 이후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금융 거래는 활발해졌지만 부채가 넘쳤고 불평등과 불안이 싹텄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이 손실은 사회화하고, 이익은 사유화하며 위험을 불공정하게 배분하고 있다.
저자는 해결을 위해서는 화폐를 물리적 사물로만 이해하고, 화폐는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상수라는 통념을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화폐는 수시로 변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이다. 화폐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내려면 경제적 가치 기준이 고정되어서는 안되고 민주적 정치의 요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화폐정책의 궁극적 목적은 화폐의 안정이나 금융의 안정이 아니라 사회의 정의와 번영”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1만8,000원.
/김현진기자 sta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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