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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만 허락된 공간…'문혁 광기' 견디고 중화제국 상징으로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 이야기] <1> 창건 600주년 맞는 자금성

유목·농경 아우른 이미지 베이징에

명나라 영락제 10년간 공사 끝 완성

불리한 자연조건·외부침략 극복하려

10m 성벽 세웠지만 독재·폭정 부메랑

톈안먼과 함께 몇 안남은 전통시대 유산

마지막 황제 '푸이' 궁에서 쫓겨나고

고궁박물원으로 바꿔 일반인에 개방

관광객들이 베이징의 경산 만춘정에서 자금성을 굽어보고 있다. 황색 지붕과 홍색 담벼락이 웅장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최수문기자






중국에는 한·당·송·명 등 수많은 왕조가 있었고 또 그만큼 많은 궁궐도 존재했지만 현재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전통시대 최후의 왕조였던 명·청 시대의 자금성만이 베이징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나름대로 거대했을 과거 궁궐이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다음 왕조가 일부러 파괴했기 때문이다. 전 시대 왕조의 후계자들이 현시대 왕조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과거 유산의 파괴로 이어졌다.

마지막 왕조의 궁궐이었던 자금성도 비슷한 운명을 지닐 뻔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대규모 문화유산이 파괴됐고 자금성도 그 대상이었다.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가 반대해 그나마 살아남았다고 한다.

다행이기는 하다. 자금성마저 파괴됐다면 베이징의 풍경은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자금성 보존이 전적으로 저우언라이의 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현시대의 제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이 과거 ‘중화제국’의 계승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천안문과 천안문광장이 필요했고 여기에 자금성은 당연히 남아 있어야 했다. 이런 정책적 판단이 전통유산 파괴라는 광기를 이긴 것이다. 만주족의 청나라가 전 왕조인 명나라의 자금성을 그대로 사용한 이유와도 비슷하다.

자금성이 베이징에 위치한 것은 필연 같은 우연이 겹치며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가 됐기 때문이다. 역대로 중국의 수도는 시안이나 뤄양·카이펑·난징·항저우 등 베이징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했다. 중국 민족인 한족이 황하 유역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 도시에서 베이징은 한참 멀다. 특히 베이징은 위도 40도상에 위치하는데 기존 중국 왕조들의 수도보다 기후가 춥고 건조하다. 물이 부족하고 농사도 어려웠다.

중국의 상당 부분을 지배한 왕조 가운데 베이징을 수도로 처음 정한 것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다. 금나라는 만주와 몽골, 중국 내지를 동시에 통치하면서 그 중심인 베이징에 수도를 정했다. 금나라를 멸망시킨 원나라 역시 베이징이 수도였다.

몽골족의 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다시 한족의 국가를 만든 명나라는 처음 수도였던 난징을 떠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다. 원나라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유목지역과 농경지역을 아우른 통합 이미지에 수도 베이징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 시절 10여년의 공사 끝에 1420년 자금성을 완성했다. 2020년 내년이면 정확히 창건 600주년이 된다. 왕조국가 특성상 궁궐이 먼저 지어지고 이어 베이징성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중국 베이징을 찾는 사람들의 첫 방문지는 대개 천안문광장이다. 마오쩌둥의 사진이 높이 걸린 천안문은 중국 국가 휘장에도 있는 중국의 상징이다. 엄밀히 말하면 천안문은 자금성의 일부는 아니다. 조선시대 서울(한양)이 한양도성과 경복궁의 이중구조였다면 베이징은 베이징성·황성·자금성의 3중구조였다. 황성에는 태묘(한국의 종묘), 사직단, 관청, 정원 등이 있었다. 천안문은 황성의 정문이었고 황성 안에 황제만의 공간인 자금성을 뒀다.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이다.



관광객들은 늘 천안문을 통과해 자금성 오문으로 걸어가기 때문에 자금성이 크게 보이고는 한다. 자금성은 직사각형 구조인데 남북 961m, 동서 753m로, 넓이는 72만㎡다. 서울 경복궁의 넓이가 43만㎡이니 자금성은 경복궁의 1.7배에 불과하다. 당시 국토와 인구에서 중국과 조선을 비교할 경우 자금성이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닌 셈이다.

자금성이 웅장하게 느껴지는 것은 개개의 건물들이 크고 또 남북 축선상에 위치하면서 동서로 대칭을 이루기 때문이다. 크게 외조와 내정으로 이뤄지는데 중국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이라는 태화전을 비롯해 중화전·보화전은 왕이 정무를 보는 외조다. 실제 왕과 왕비가 살던 건청궁·교태전·곤녕궁 등은 내정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자금성 정문인 오문으로 들어가 직선으로 걸어서 북쪽 신무문으로 나오면 앞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가로막는다. 바로 경산인데 대부분 평지인 베이징성 내에서 유일하게 ‘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원래부터 산은 아니고 베이징성 건설 과정에서 호수를 만들면서 파낸 흙을 쌓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에서 자금성은 위도상으로 가장 북쪽에 있는 수도의 궁궐이다. 기후도 나쁜데다 북쪽에는 당시 최대 적국인 몽골이 있어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이러한 특징이 자금성의 모습을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자금성의 성벽 높이는 10m나 되는데 이는 성벽 안과 밖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불리한 자연조건과 외부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금성을 국경의 군사기지 모습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자금성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성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역대 황제들이 독재권력을 강화하고 때로는 폭정을 일삼던 이유도 이러한 생활 방식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자금성이 완공된 시점은 경복궁(1395년 완공)보다 25년 늦다. 조선왕조의 창건자들은 앞서 고려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자 철저하게 유교원리에 따라 경복궁을 지었다. 중국의 자금성도 마찬가지다. 명나라는 앞선 몽골족 왕조와 차별화하기 위해 유교 방식을 채택했지만 여기에 도교·불교식이 개입하고 또 터무니없이 사치를 부리면서 현재 자금성의 모습이 됐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그대로 눌러살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가 1924년 쫓겨나고 이듬해인 1925년부터 현재의 고궁박물원으로 이름을 바꿔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베이징에서 전통시대 베이징성의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자금성과 천안문 등 몇몇 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중국이 들어서고 도심 개발에 밀려 원래 베이징성·황성 성곽을 비롯해 중요한 건축물들은 모두 사라졌다. 중국 전통시대 신성시된 태묘가 현재 회의장이나 공연 무대로 사용하는 데서는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베이징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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