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 한 장도 맘대로 안 쓰고 번 돈이지만 죽으면 뭐 하겠나. 과학기술 인재 키우는 데 내놓아야지….”
이수영(84·사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발전재단 이사장은 29일 서울 인사동 정신영기금회관에서 관훈클럽이 주최한 관훈초대석에 참석해 “일본 사람보다 머리도 더 좋은데, 일본은 노벨상을 24명이나 받았는데 우리는 왜 하나도 없느냐”며 이같이 밝혔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이 이사장은 지난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경제신문 기자로 맹활약했다. 기자 시절 주말을 활용해 목축업을 병행했으며 퇴직 후 부동산업에 투신해 조직폭력배에게 시달리면서도 재산을 모아 2012년 80억원, 2016년 10억원 상당의 미국 부동산을 KAIST에 기부한 데 이어 올해 7월 추가로 676억원의 부동산을 과학인재 양성에 내놓기로 했다.
이 이사장은 “여의도 맨하탄빌딩 3분의1 인수 등 부동산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지금도 명분이 있으면 큰돈도 쓰지만 그렇지 않으면 철저히 아낀다”며 “최근에 경매로 부동산을 추가로 취득했는데 모두 과학인재 양성에 내놓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노벨상을 받는 게 뭐가 그리 어렵나. 노벨상을 받는 인재를 키우겠다”며 “지금도 KAIST 출신들이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의 16%를 차지하는 삼성전자의 석·박사 연구인력의 25%를 차지한다. 과학기술 인재를 키우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삼성전자가 소니를 제친 지 꽤 오래됐는데 과학인재를 키워 노벨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고 과학기술 파워로 무장한 글로벌 기업도 많이 배출하자는 게 그의 신조다.
이 이사장은 “어려서 일제강점기에 아버지가 일본인에게 쌀을 뺏기는 것도 봤고 6·25전쟁 중 1·4후퇴 당시 중공군이 몰려왔던 의왕 백운호수까지 피난을 갔다가 빗발치는 총탄에 극심한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며 “이런 세월을 겪고 기자를 하고 사업을 했는데 죽기 전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것을 봤으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
앞서 그는 올해 7월 맨하탄빌딩 사무실에서 5시간30분에 걸쳐 서울경제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사람들은 노벨과학상 수상을 위해 기부한다고 하면 공돈을 번 줄 안다. 그런데 잠 안 자고 번 돈”이라면서 “‘죽으면 가지고 가나’라는 생각에 전 재산을 기부하기로 결심했으나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한 바 있다. 당시 그는 “과학기술의 힘으로 우리가 잘사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힘인데 우리가 미국 사람보다 머리가 낫다”며 “부동산 평가도 올해 끝내고 나머지 부동산도 죽기 전에 전부 재단에 출연할 것이다. 최대 1,000억원 정도는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조만간 공익재단인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을 출범시켜 내년부터 KAIST를 중심으로 과학인재 양성에 본격적으로 나설 방침이다.
이와 관련, KAIST는 과학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독창적인 과학지식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연구를 지원하기로 했다. 인류의 난제를 해결할 연구를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KAIST 싱귤래리티 교수’를 선정할 방침이다.
이 이사장은 이날 관훈초대석에서 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와 관련해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과의 일화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서울경제 기자 시절 이병철 회장을 처음 인터뷰하러 ‘사업보국’이 붙어 있는 사무실에 들어서니 용인 자연농원을 만들 때라 목축이나 식물재배에 관한 일본 책을 넓은 책상에 산처럼 쌓아놓고 있었다”며 “처음에는 냉혹하게 폐부를 찔러보는 안광(眼光)이었는데 점차 아버지 눈빛으로 변했다”고 이 회장의 첫인상을 털어놓았다. 당시 인터뷰 목적이던 청동기 칼과 가야금관, 골동품은 못 보고 오원 장승업이 비단에 그린 춘(春)·추(秋) 두 폭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봤고 이 회장의 골동품 수집에 관한 여러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이 회장은 도쿄 골동품상에 헐값에 나온 골동품이나 그림을 많이 사들였다. 우리 문화재에 한국 백성의 혼이 담겨 있다고 봤기 때문”이라며 “이 회장이 골프와 함께 미술품·골동품 수집이 취미였는데 고종황제의 아들인 영친왕(이은)이 생활고로 도쿄 골동품상에 헐값에 판 골동품이나 그림을 좍 사들였다”고 전했다. 해방 이후 도쿄 거리에서 산 골동품이나 그림 중에는 이은씨가 내놓은 것도 많았고 궁중화가인 오원의 그림이라든지 귀중한 문화재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는 “첫 인터뷰 때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부장이 동행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호암미술관이 1975년 한일 수교 10주년 기념 일본 전시회에 많은 미술품을 전시하게 됐다”고 했다. 이어 “다음에 이 회장을 만나거나 전경련 행사장에서 볼 때 먼저 말을 걸며 ‘이수영 기자 이리 와요’ 하며 먼저 챙겨줬다”며 “이 회장 취재 뒤 다른 재벌 회장의 취재가 용이해졌다”고 회고했다.
한편 이 이사장은 “사업하다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신장암 등 암을 두 번이나 앓기도 했다”며 “1980년에 언론계에서 해직됐다가 사업으로 성공한 뒤 관훈클럽에 와서 발표하니 감개무량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관훈초대석 참석 후 임종건 전 서울경제 부회장과 함께 친정인 서울경제 본사를 방문, 이종환 대표이사 부회장과 환담한 뒤 편집국에서 후배들과 만나 “나는 서울경제 시절을 인생의 황금기라고 생각한다”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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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서울 △1956년 경기여고 졸업 △1960년 서울대 법대 졸업 △1963년 서울신문 수습기자(4개월) △1964년 현대경제일보 기자 △1969년 서울경제 기자 △1971년 광원목장 창업 △1980년 서울경제 퇴사 △1988년~ 광원산업 대표 △2010~2012년 서울대 법대 장학재단 이사장 △2012년 KAIST 명예박사 △2013년~ KAIST 발전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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