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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벤치마킹 해놓고 더 센 규제...신규 화학물질 개발 접는다

■ 전방위 규제에 벼랑 끝 기업들

<중> 기업 부담 가중시키는 화관법·화평법

2030년까지 신고·등록 필요한 화학물질 1만7,000여종

개당 최대 47개 자료 제출...대기업외엔 비용 감당 못해

화관법은 내진설계 등 준수항목 336개 "시설 교체하다 끝날판"





A 기업은 최근 세정제 원료로 쓰이는 화학물질 연구개발(R&D) 작업을 중단했다. 사업성이 당초 기대에 크게 못 미칠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에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이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화평법은 기존 화학물질은 연간 1톤 이상, 신규 화학물질은 0.1톤 이상 제조·수입할 경우 정부에 등록하도록 하고 있다. 전문 컨설팅 업체에 의뢰해보니 검사 비용 등 총 등록 비용이 2억원 이상 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A 기업은 물질 등록에 드는 비용을 고려해 지금 단계에서 개발을 멈추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화학물질 등록 컨설팅 업체의 한 관계자는 “신규 화학물질 등록에 드는 비용이 적지 않다 보니 자금력이 약한 화학·소재 기업들은 아예 개발 단계에서 신규 물질 개발을 포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규제가 산업계의 새로운 화학물질 개발 의지를 꺾어버린 셈이다.

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화평법에 따라 오는 2030년까지 신고·등록해야 하는 화학물질은 모두 1만7,000여종이다. 1개 물질당 최대 47개의 독성 시험자료를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시험 기관에 테스트를 맡기거나 외국 기업이 보유한 기존 시험 자료를 구매해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 다품종을 소량 사용하는 업체의 경우 부담이 더 크다. 위반 시 매출액의 5% 이하에 해당하는 과징금을 물어야 한다. 한 국내 화학 업체 관계자는 “1~10톤을 사용하는 기존 화학물질에 대해서도 등록을 해야 하는 2030년이 되면 국내 화학 업계가 대대적으로 재편될 것”이라며 “화평법 대응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은 살아남고 그러지 못한 곳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독성 화학물질을 일일이 관리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제도 도입 의도인데 직접 이해당사자인 산업계가 져야 할 부담은 엄청나다. 당장 내년까지 등록해야 하는 화학물질은 1,963종으로 여기에 드는 비용은 최대 1조원으로 추정된다. A 기업처럼 신규 물질 개발의 싹을 잘라버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정부가 일본 수출 규제에 대응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해놓고 화학 규제 때문에 기업들이 소재 개발을 포기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지적이다.

화평법은 유럽연합(EU)의 신화학물질 규제(REACH)를 모델로 했지만 정작 ‘원조’보다 규제 강도가 더 세다. EU의 REACH는 등록 기준을 연간 1톤 이상으로 하고 있지만 화평법은 0.1톤(신규 물질)으로 대상이 훨씬 넓다. 미국은 10톤, 일본은 1톤 이상이다. 주요 선진국 대비 과도한 신규 화학물질 등록 기준 탓에 소재 분야 국가 경쟁력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기존 화학물질도 기업이 직접 정부에 등록하는 제도를 운영하는 곳은 유럽 뿐이다. 미국이나 일본은 정부가 직접 시험·평가를 하고, 필요할 경우에만 기업에 추가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정도다.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도 화평법과 마찬가지로 ‘규제의 역설’을 일으키고 있다. 화관법은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기업들의 시설 기준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만8,000여개 기업들이 내진 설계와 경보장치, 유독 물질을 사용하는 혼합기, 저장탱크 등 총 336개 시설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신규 화학시설을 1대만 설치해도 336개 기준을 준수했는지 정부 산하 기관으로부터 적합 판단을 받아야 가동이 가능하다. 그나마 대기업들은 시설 변경에 드는 금전적 부담을 감당할 여력이 있지만 영세 업체들은 사업을 접는 것이 차라리 나을 판이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시설 설치 비용은 평균 3,700만원으로 나타났다.

화관법 외에 위험물안전관리법, 고압가스관리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관련 부처들의 소관 법률상 기준이 달라 업계가 혼선을 겪는 점도 문제다. 컨설팅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업안전보건법 기준으로 시설을 변경했는데 화관법 기준은 충족하지 못해 시설을 재변경해야 하는 사례도 있었다”며 “시설 하나를 두고 부처들이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니 업체 입장에서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자 대한화학회·한국화학공학회·한국공업화학회·한국고분자학회·한국화학학관련학회연합회 등 화학 관련 5개 학술 단체는 최근 화평법·화관법 전면 개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과도한 화학물질 규제가 화학 산업은 물론 안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 단체는 “화평법과 화관법에 의한 등록·관리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기업의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노력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주는 기업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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