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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쌓아 자아를 잊고…한지를 태워 작품을 잇다

김민정 개인전 '타임리스'

'타다 만 종이' 붙이는 미적수행

비벼 끄기 수만번, 지문 다 닳아

채움·비움 '음양의 조화' 담겨

서울 갤러리현대서 28일까지

김민정 '스트리트(The Street)' /사진제공=갤러리현대




한지와 불을 이용해 독특한 물성의 작업을 펼치는 작가 김민정. /사진제공=갤러리현대


한지를 잘라 손에 쥔다. 촛불을 켠다. 종이를 댄다. 살짝 탄 종이 끝에 검은 결이 생긴다. 향을 켠다. 향불 끝이 종이를 파고든다. 불과 종이를 다룰 때는 혼신을 다해 집중해야 한다. 깜빡 정신을 놓으면 호로록 타버리는 게 한지다. 붙은 불이 딱 원하는 방향으로 필요한 만큼만 타들어가야 하기에 유심히 보다가 손으로 눌러 끈다. 만지고 비비고 끄기를 수천, 수만 번 반복하는 무아지경의 시간이 쌓였고 지문은 다 닳아 없어졌다. 매끈한 게 손끝과 한지가 똑 닮은 화가 김민정(59). 그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한창이다.

김민정의 신작 '앵무조개'. 살아있는 화성이라 불리는 앵무조개는 원시적 몸체에 황금비율을 담고 있다.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천년가도 변치않을 종이미학


꽃잎이 내려 앉았나 싶어 들여다보면 결 하나하나를 태워 붙인 종이로 이뤄져 있다. 우산살 펼치고 다닥다닥 붙어 걷는 비 오는 거리를 내려다 본 듯한 작품 ‘스트리트(The Street)’는 은은한 색이 멋을 더한다. 켜켜이 붙인 종이가 휘몰아치며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이 고목의 나이테 같기도 한 신작의 제목은 ‘앵무조개(Nautilus)’. 원시적 신체를 그대로 갖고 있어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앵무조개는 황금 비례를 몸으로 보여주는 생물로도 유명하다. 수천 년 시간을 응축한 그 몸이 천 년 가도 변치 않는 한지로 되살아 났다.

“종이라는 재료는 ‘외유내강’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태우거나 구멍을 뚫지 않는 한 몇 천 년 갈 수 있는 질긴 재료이고, 그게 우리 인간의 질긴 습성과 같죠. 약하지만 끈질긴 습성은 저와도 잘 맞고, 종이를 만지노라면 내 피부의 연장선이 종이인 것만 같아요. 한지를 그냥 두면 오래돼 없어질 때 까지 몇 천 년이 걸리는데, 종이를 태우는 일은 그 시간을 축약하는 것이고, 없어지기 직전의 상황이 태운 선으로 나타납니다.”

종이를 태우는 것이 없어지기 직전의 자국을 남기는 것임을 강조하며 작가는 기록을 위해 고안한 종이의 기원을 언급했다. 물감이나 먹 대신 종이와 불을 재료로 그린 그의 작품들 앞에서 관람객들은 “하아~” 감탄사를 흘린다. 정교한 그림을 머리 속에 다 그려 놓고 종이와 불 작업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데다, 얇디 얇은 종이를 작게 태워 일일이 아교로 붙이는 공정을 상상하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하필 재료로 종이를 택했냐는 질문에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한 까닭도 있지만 동양 사상이나 철학, 삶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표현하기에 종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종이가 먹을 빨아들이는 흡수성이나 공기가 건조할 때 뿜어내는 성질, 그게 종이가 살아있다는 뜻이고 우리 피부가 숨쉰다는 것과도 같다”고 말했다.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후 르네상스 미술의 탄생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유럽에서만 활동해 온 작가는 외국에서 더 유명하다. 영국 런던의 화이트 큐브, 독일 노이스의 랑겐 파운데이션에 이어 지난해에는 미국 뉴욕의 힐 아트 파운데이션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대영박물관 등 유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한국의 단색조 추상회화에 대한 관심이 높던 2016년에 개인전을 연 영국 런던의 화이트큐브 갤러리는 그를 ‘여성 단색화 작가’로 소개하기도 했다. ‘단색화’는 자연적 재료를 이용해 수행에 가까운 반복적 행위로 물성을 드러내는 독창적 기법을 공통 분모로 갖는다.

갤러리현대에서 한창인 김민정의 개인전 '타임리스' 전시 전경. /사진제공=갤러리현대




물을 그리니 산이 됐다, 달라야 잘 맞더라


1960년대 김환기가 소리를 그리고자 했듯, 한동안 김민정은 “바닷물이 끝도 없이 들어오는 파도의 소리”를 그리고 싶었다. 엷은 먹이 점점 진해지고 겹치는 형상으로 소리의 파동을 그리고 봤더니 바다가 아니라 산이었다. “파도의 소리가 산으로 보이니 그러면 산으로 받아들이겠다 마음먹고 제목도 ‘산’이라 붙였다”는 작품들이 색깔 별로 전시 중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산 그림을 자르고 다시 태워 붙였더니 바다가 된 것 아닌가. 김 작가는 “한 줄 한 줄 태워진 자국은 산인데, 더 촘촘한 산이 물결 같은 느낌이 났다”고 소개했다.

김민정 '푸른 산' /사진제공=갤러리현대


물결을 연상시키는 김민정의 '타임리스'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지하 1층 전시장은 신작들이다. 2점 1세트인 ‘커플(Couple)’에는 관계에 대한 철학이 담겼다.

“종이를 동그랗게 자르면 잘라서 빈 부분과 잘라내서 만든 부분이 생겨요. 파낸 것은 쓸모 있고 파고 남은 것들은 버릴 법한 것인데, 그걸 보면서 ‘커플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구나’ 깨달았습니다. 잘라낸 것이 다시 돌아왔을 때, 전체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배경이 됩니다.”

채우기 위한 비움, 비움으로 가득한 채움은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음양의 조화라는 작가의 오랜 예술관을 드러낸다. 종이(紙)와 불(火)을 다루기 위해 자신(自)을 녹이고 태워낸다는 의미에서 김민정의 작업은 ‘지화자’다. 전시의 제목은 ‘타임리스(Timeless)’. 작가의 시간을 죽여 작품이 살았고 영원성을 얻었다. 전시는 28일까지.

김민정의 '커플'


김민정의 '커플'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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