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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칼럼] 지나친 선택권이 미국을 해친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인간 정보처리 능력 제한적인데

보험부터 전기까지 '과도한 옵션'

되레 실수 저지를 가능성만 높여

규제완화 내밀어도 일단 의심하라

폴 크루그먼




텍사스주 부지사인 댄 패트릭은 아버지의 말대로 ‘버릇없는 친구’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초기, 그는 “젊은이들이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나이 드신 분들은 기꺼이 사망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해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뿐 아니다. 지난달 한파 이후 1만 7,000달러의 전기료 고지서를 받아든 텍사스 주민에게는 “잔글씨로 적힌 단서 조항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은 본인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전기료 고지서에 관한 패트릭의 견해는 필자에게 되씹어볼 또 다른 화두를 안겨줬다. 어쩌다 미국은 가정용 전력 공급 계약과 같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로 날벼락을 맞는 나라가 됐을까.

전기료만이 아니다. 뉴욕타임스 마고 생어카츠의 조사에 따르면 많은 미국인이 의료보험을 잘못 선택한 탓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짊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보험 선택이 전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보험 전문가들조차 자신에게 맞는 최선의 보험을 선택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잘못된 선택의 피해는 심각하다. 자신이 택한 건강보험에 속하지 않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가 어마어마한 의료비 폭탄에 맞을 수 있다. 지난 2008년의 금융위기는 채무자에게 거대한 리스크를 안겨주는 새 금융 상품에 의해 촉발됐다.

경제학 개론과 보수적 이념은 선택의 여지가 많을수록 좋다고 주장한다. 1980년 자본주의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유명 TV 시리즈 역시 ‘자유로운 선택(Free to Choose)’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선택의 폭은 클수록 좋다는 이데올로기의 확산으로 미국도 달라졌다. 한때 일상이었던 부분이 지금은 미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중대한 결정을 요구한다. 요즘 퇴사하는 직원들은 회사에서 지급하는 연금을 그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연금을 어떻게 투자할지 결정해야 한다. 정년인 65세에 이르면 이전처럼 자동적으로 의료보험 수령자가 되는 게 아니라 여러 의료보험 중 어디에 가입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전기와 전화 서비스도 광범위하고 다양한 여러 옵션들 중 하나를 직접 골라야 한다.

선택의 확대는 대부분의 경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선택의 폭이 크고 선택지가 많을수록 좋다는 주장은 모든 사람들이 일상사의 세세한 부분까지 챙길 만한 무제한의 역량을 갖고 있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돌봐야 할 자녀, 해야 할 일, 꾸려가야 할 삶이 있지만 정보처리 능력은 제한돼 있다.

지나치게 많이 선택하는 것은 큰 문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건강보험과 텍사스 전기료가 지니는 교훈은 너무 많은 선택지를 받은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커다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과다한 선택은 인간적 한계를 악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에게 끼어들 공간을 제공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기 전에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에드워드 그램리치는 잠재적 위기를 사전에 경고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그는 “위험천만한 대출 상품이 가장 어리숙한 차입자들에게 팔리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램리치는 그의 질문 속에 대답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어리숙하기 때문에 거간꾼들에게 속아서 구매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료비 청구에도 부정한 방식의 이윤 추구가 끼어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어리숙한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과다한 선택은 참담한 경험을 겪지 않는 미국인들에게도 심리적인 악영향을 준다. 실제로 이른바 빈곤 경비(costs of poverty)가 저소득층 가정에 단순히 생필품을 확보하는 어려움을 겪는 것 이상의 문제를 안겨준다는 연구 결과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빈곤층은 지금 갖고 있는 돈으로 음식을 구입해야 할지 집세부터 내야 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부유층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정신적·심리적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셈이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은 제한돼 있기 때문에 빈곤층이 겪는 금전적 부담은 다른 문제에 대한 판단력을 저하시켜 자기 파괴적인 삶을 선택하게 만든다.

모두 불필요한 피해다. 미국은 경제 부국이다. 교활한 모기지 대출 업체들로부터 미국인들을 보호하거나 전력 도매가격의 변화로 평생 모은 돈을 한꺼번에 잃어버리지 않도록 막는 데는 많은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차후 어떤 정치인이 선택의 폭을 늘려줄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새로운 규제 완화 정책을 내밀면 일단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라. 많은 옵션을 지니는 것이 자동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다. 미국인들은 지금 과도한 선택권에 짓눌려 있다.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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