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비집고 나무 가르며 싹이 움트는 계절이다. 시청 앞 서울광장 잔디에 파릇한 기운이 짙어질 무렵, 하단부 외벽 색이 그 초록과 꼭 닮은 맞은편 건물로 눈길이 이어진다. 도심 한복판에서 자연의 색을 입고 앉은 한화 더 플라자 호텔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조선의 국영 호텔 격인 태평관(太平館)이 있었다고 한다. 덕수궁을 옆에 끼고 경복궁과 북악산을 바라보는 ‘외교 명당터’인지라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지는 맞선의 성지(聖地), 돈과 행운이 모이는 비즈니스 미팅의 길지(吉地)로 입소문이 난 곳이다.
더 플라자 호텔 로비에 들어섰을 때 정문과 마주 보는 벽면 전체가 작품이다. 조각가 차종례(53)의 ‘드러내기와 드러나기 101020’. 멀찍이 떨어져서 전체를 보자. 높이 15㎝의 뿔처럼 뾰족한 나무 조각이 족히 수천 개는 됨 직하다. 바람이 어루만지듯 어떤 것은 조금 누웠고 어떤 것은 발딱 솟았다. 뾰족한 끄트머리가 높이와 모양을 달리하며 저마다의 목소리로 재잘거린다. 새싹 같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주먹만 한 원뿔들이 등고선 같은 결을 품고 있다. 나이테가 드러나게 다듬은 것인가 싶으나, 실은 자작나무 목재가 겹친 흔적이다. 차곡차곡 흙이 쌓인 것과 같은 원리다. 이것은 산이기도 하다.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고, 그 나무로 깎은 산의 형상에 자연의 순리와 생명의 순환이 담겼다.
“처음 세상에 나오는 싹은 대지를 뚫어야 하기에 끝이 뾰족하게, 날카롭기 마련입니다. 전 지구에서, 땅에서 가장 높게 치솟은 에베레스트산도 삼각의 뿔 형상이기는 마찬가지예요. 처음과 끝이 결국에는 엇비슷한 형태로구나, 이 모양으로 자연의 변화를 이야기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작업입니다.”
차 작가는 지난 2010년 대대적인 호텔 리모델링 때 의뢰를 받아 폭 870㎝에 높이 285㎝인 초대형 작품을 제작했다. 가로·세로·높이가 15㎝인 정육면체의 나무를 깎아 바닥은 판을 이루고 그 위로 한두 개 혹은 서너 개의 뿔이 솟아난 형태를 무작위로 만들었다. 가로 58개, 세로 19개이니 붙인 판만 1,102개이고 깎은 뿔은 3,000개가 넘는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놓느냐다. 작가는 “자연의 에너지가 흘러가는 방향을 만들고자 수십 번이나 다시 배치했다”고 한다. 서 있는 보리밭이나 갈대밭 사이를 지나는 바람은 보이기라도 하지, 밟히는 잔디밭 아래로 흐르는 묵직한 생명의 기운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을 일이다. 뾰족뾰족한 벽면을 두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차피 호텔 벽면은 편히 기대는 곳이 아니다. 여러 목적의 다양한 이들이 오가는 도심 한복판 고급 호텔의 로비는 낯섦과 설렘, 긴장과 기대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작품은 그 날렵한 감정을 세련되게 드러냈다.
차종례의 ‘드러내기와 드러나기’는 장식용 가구로 로비 복판에 놓인 발 뾰족한 검정 테이블과 어우러지며 또 한 번 빛난다. 살결 같은 나무 색과 광택 나는 검은빛이 질감에서 확연한 차이를 갖지만 뾰족한 형태 면에서 공통분모를 이룬다. 호텔 리노베이션 총괄감독으로 영입된 이탈리아 출신 디자이너 귀도 치옴피의 작품이다. 자연 친화적인 호텔 외관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치옴피의 디자인과 조화를 고려해 호텔 측에서 수많은 작품을 검토했다고 한다. 보이지 않지만 로비 전체를 꽉 채운 은은한 향, 유칼립투스를 조합해 만든 더 플라자 호텔 특유의 향기도 치옴피의 작품이다. 나무로 만든 뿔 조각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 느끼더라도 자연스럽다.
직접 운전해 더 플라자 호텔을 방문할 경우 반드시 지나야 하는 또 하나의 로비가 있다. 바로 뒤 건물이자 호텔 주차장과 연결되는 소공 한화빌딩이다. 주차장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오른쪽 벽 위쪽에 이우환(85)의 1994년작 ‘조응(Correspondance)’이 걸려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조응’과 같은 시기의 작품인데 넓지 않은 벽에 맞춤한 듯 자리를 잡았다. 허연 캔버스에 무심한 회색 점 7개가 찍혀 있다. 왜 점이 7개인지 궁금하다면 차라리 북두칠성이 왜 별 7개인지를 고민하는 게 낫다. 이우환의 점은 별이 아니라 별자리다. 별자리가 밤하늘에 있지도 않은 선으로 별을 연결한 것이듯, 점의 존재를 인식하고 점과 점 사이의 관계를 감지해야 그림 맛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로비 쪽으로 발을 옮기면 파도 같고 폭포 같은 푸른색의 4폭 회화가 펼쳐진다. 파랑의 화가로 서양에 이브 클랭이 있다면 한국에는 김춘수(64)가 있다. 여러 파란색 중에서도 진한 보랏빛 청색을 띠는 울트라마린으로 주로 작업해왔다. 그의 1997년작 ‘수상한 혀 9726~9’는 멀리서는 물의 기운을 느끼게 하지만 가까이서 숱하게 펼쳐진 붓질을 보노라면 잎사귀 무성한 나무 아래 드러누운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주변이 어둑해진 밤에는 작품이 내뿜는 거대한 푸른빛 때문에 “커다란 어항 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반복된 행위와 물성에 대한 실험과 연구를 평생 화두로 삼는 한국의 추상화가들을 ‘단색화 작가’라 묶어 부르는데, 파랑 하나만으로 색과 획, 움직임과 에너지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김춘수도 그중 하나다. 1990년대 작가의 전성기 대표 연작인 ‘수상한 혀’ 시리즈는 반복해서 내리그은 수직적 붓질이 겹치고 포개져 속도감과 함께 형상과 물질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이후 선보인 근작 ‘울트라마린’은 수평적 붓질로 변화하면서 근원과 깊이를 탐색하고 있다.
그 옆은 사후 더욱 조명받고 있는 윤형근(1928~2007)의 작품 ‘다,청(茶,靑·Umber-Blue)’이다. 흙을 뚫고 나온 새싹이 열린 땅 사이로 맨 처음 본 하늘의 모습이려나. 폭 220㎝에 높이 480㎝로 길쭉한 작품 전체에서 움츠렸던 몸을 펴는 기지개 같은 청량한 긴장감이 돈다. 윤형근은 토양에서 유래한 흙색의 물감 엄버(umber)를 잘 숙성된 차색으로 여겨 다(茶)색이라 불렀고 오일과 함께 군청색을 섞어 자신만의 자연 빛을 만들었다. 섞은 기름의 농도에 따라 색의 강렬함, 번짐의 아련함이 달라졌다. 갈색 엄버가 땅이고 푸른 블루는 하늘인 격이라 작가 스스로도 “내 그림은 천지문(天地門)”이라고 했다. 열린 문은 가능성이며 포용력이다. 검은 문이 열리며 새어 들어온 한 줄기 빛처럼, 그림은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한다.
그 앞에 놓인 청동 조각은 원로 조각가 박종배(86)의 ‘붙잡힌 상황’이다. 국전(國展)에서 대통령상·국무총리상을 휩쓴 거장이 좌대 없이 바닥에 조각을 놓게 했다. 누구든 이 상황에 자신을 투영해도 좋다는, 마음 넓은 작품이다.
일찍이 좋은 작품을 품은 로비의 안목이 탁월하다. 1990년대 중반 작품을 구입할 당시만 해도 몇백만, 몇천만 원이었을 그림들이 지금은 ‘억 소리’를 낸다. 호텔 로비의 차 작가도 이곳에 작품을 설치한 후 문의가 이어져 미국 내슈빌과 중국 장저우 등 국내외 호텔에 작품을 설치했다. 작품을 음미하기에는 로비가 다소 좁아 아쉽기는 하지만 그 또한 빠듯하게 살고 있는 현대인의 삶 같다. 값보다 돋보이는 것은 서울광장에서 안고 들어온 자연의 기운을 더 플라자 호텔을 거쳐 한화빌딩의 로비로 확산시키고 인근 오피스 빌딩에까지 나눠준다는 점이다. /조상인 기자 csi@sedaily.com 사진=성형주 기자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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