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수의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잇따라 한국으로 향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을 거머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주요 2개국(G2)의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대만·일본·네덜란드 등 반도체 강국이 중국에 대항해 글로벌 ‘GVC 가치 동맹’을 한층 강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미국이 ‘칩스 포 아메리카’를 내세워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처럼 우리도 ‘칩스 포 코리아’ 전략을 짤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지난 30년간 글로벌 무역 성장을 이끌었던 글로벌가치사슬(GVC)이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 간 갈등과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크게 흔들리면서 글로벌 가치 동맹을 더욱 촘촘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 향하는 글로벌 업체=한국에 1,000억 원 규모의 추가 투자를 결정한 도쿄일렉트론(TEL) 외에도 지난해와 올해 반도체 소부장 분야에서 수위를 다투는 해외 기업들이 잇따라 한국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반도체 초미세 공정용 장비 업체인 네덜란드의 ASML은 경기도 화성시 동탄일반산단 인근 부지를 매입하고 오는 2024년까지 극자외선(EUV)·심자외선(DUV) 노광장비 재제조 센터와 엔지니어 교육 시설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반도체 식각 장비 등을 공급하는 램리서치의 한국 생산 법인인 램리서치매뉴팩춰링코리아도 화성시 발안공단에 제3공장을 설립했다. 기존 국내 1~2공장 생산 용량의 2배 이상에 달하는 규모다. 지난해 충남 천안에 EUV 노광 장비용 포토레지스트(PR) 생산을 위한 투자를 결정한 미국의 듀폰도 한국 시장의 성장성을 믿고 투자를 결정한 기업 중 하나다. 당시 정부는 듀폰의 투자를 통해 일본 기업에 90% 이상 의존하고 있는 EUV용 포토레지스트를 국내에서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점을 강조하며 외투 기업의 투자를 더욱 활성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GVC가 정상 가동하던 수년 전만 하더라도 이 같은 지역 밀착형 거점 마련의 필요성은 높지 않았다. 자유로운 이동과 원활한 물류 시스템이 보장만 된다면 굳이 코앞에 기반 시설을 두지 않더라도 글로벌 고객사들과 손쉽게 협업이 가능했다. 그러나 G2 갈등은 동맹국과 비동맹국 간에 큰 장벽을 쌓아올렸고 미증유의 팬데믹은 기업들에 리스크 대응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이에 따라 외부 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생태계 구축이 빠르게 이뤄지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일본·대만·네덜란드 등으로 맺어진 글로벌 반도체 가치 동맹이 향후 중국과의 반도체 패권 다툼에서 어떤 효과를 일으킬지가 향후 반도체 업계의 관전 포인트다.
◇반도체 K벨트 강화 인센티브 절실=가치 동맹 강화는 한국에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제조와 연구개발(R&D) 기반 확대는 관련 산업 생태계를 두텁게 하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물론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도 상당하다. 지난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코로나19, 미중 갈등으로 불거진 통상 문제 등에도 한층 용이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 번 한국에 발을 들인 해외 소부장 기업들이 실망하고 떠나지 않도록 정부가 정책적인 지원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진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사례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칩스 포 아메리카’를 내세워 자국 기업인 인텔의 극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TSMC도 수혜 대상으로 품었다.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현에 짓는 TSMC 신공장에 투입되는 1조 엔 가운데 5,000억 엔(약 5조 원)을 세금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달 26일 ‘새로운 자본주의의 실현’을 자국 경제를 위한 철학으로 밝히며 동시에 첨단 반도체 기업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과 제도 정비를 약속했다. 당시 기시다 총리는 “대만 기업의 일본 진출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불가결성과 자율성을 향상시켜 안보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따라서 한국 역시 반도체 생태계를 고도화할 수 있는 기업에 대한 화끈한 세제 지원, 해외 기업을 유인할 수 있는 파격적인 인센티브 제도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국내 공급망 강화는 외교 갈등 같은 사업 외적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며 “반도체특별법 등으로 국내 진출 기업들에 더 강한 인센티브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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