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말 당대 최고 도배 기술을 자랑하던 경성지물이 갑자기 바빠졌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회장 청운동 자택의 도배 작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실무를 맡은 이는 경성지물 상무이자 지금은 국전 대표를 맡고 있는 신호현(62) 씨. 처음에는 ‘그래도 대기업 총수 자택인데 고급 벽지를 쓰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때 떨어진 정 회장의 한마디. “비싼 것 절대 쓰지 말아.” 고민 끝에 그는 당시 현대건설이 짓던 아파트에 바르고 남은 재고 벽지를 이용하기로 했다.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싼 벽지를 썼지만 고급 벽지를 바른 다른 대기업 총수 자택 못지않은 도배가 이뤄졌다는 칭찬이 쏟아졌다.
21일 서울 구로에서 만난 신 대표는 46년 경력을 지닌 ‘도배의 신’이다. 2015년 실내 건축 분야에서 명장의 대열에 올라선 그가 도배의 길에 들어선 것은 16세 때인 1976년.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술값 정도를 벌려고 발을 들여놓았을 뿐이었지만 손재주가 좋은 터라 금세 광주에서 1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3~4년간 전국을 돌며 실력자들과 대결을 펼쳤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발목을 잡은 곳이 경성지물. 이후 그곳에 터를 잡으며 도배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신 대표의 이력은 화려함 그 자체다. 1977년 국회의사당 도배를 맡은 데 이어 청와대 영빈관, 삼청각, 국립박물관, 롯데호텔 VIP룸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고 정몽헌 현대건설 회장이 자주 이용하던 요릿집 필경재의 단골 방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신 대표는 “건설사 회장을 비롯해 많은 기업 대표들의 자택 도배를 맡았다”며 “어떤 곳은 연인원이 100명 넘게 투입돼 한 달 이상 작업한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소화한 도배 물량은 상상을 불허한다. 지금은 10명 정도를 데리고 작업 현장을 누비지만 한창때는 1년에 직접 시공한 것만 300건에 달할 적도 있었다. 신 대표는 “내가 이끌었던 팀원이 100명가량 된 적도 있었다”며 “팀 작업을 한 것까지 포함하면 연 1만 건, 지금까지는 수십만 건에 달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물량이 많다고 대충 하는 법이란 없다. 그는 도배를 ‘건축물의 피부 과학’이라고 정의한다. 화장을 하는 것처럼, 미장이나 공조가 거칠고 미흡하게 되더라도 도배가 이 모든 것을 커버해서 그럴듯한 완성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객들은 표면만 봅니다. 울퉁불퉁한 것은 물론 아주 조그만 요철도 용납하지 않죠. 게다가 도배 면적은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합니다. 하자 보수가 가장 많고 욕을 가장 많이 먹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도배를 잘하기 위해서는 실력도 필요하지만 공구도 좋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소비자의 눈높이는 갈수록 높아지는데 빗자루로 풀칠한 벽지를 쓸어내는 낙후한 방식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구를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것도 이러한 연유다. 다른 이유도 있다. 신 대표는 “예술품 같은 도구, 그립감 좋은 공구를 쓰면 자부심도 생기고 실력도 늘지 않겠냐”며 “스네이크우드, 사슴뿔 공구 같은 것들을 개발해 특허도 20건 정도 받았다”고 덧붙였다.
신 대표는 해외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 이미 ‘도배의 민족’이라는 상호도 준비해놓은 상태다. 경험도 있다. 아르헨티나와 미국·프랑스에 있는 한국문화원의 도배를 직접 담당했고 태국·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는 도배 공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 등에서 도배를 건축이 아닌 예술의 경지로 바라보면서 페인팅보다 훨씬 고급 기술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며 “손기술이 뛰어난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신 대표에게는 소망이 하나 있다. 번듯한 도배 박물관을 짓는 일이다. 자료도 상당히 수집한 상태다. 회사에도 없는 각 벽지사의 견본 1호도 그의 손에는 있다. 신 대표는 “5000만 국민이 모두 이용하고 있는 나라에서 도배 박물관 하나 없다는 것은 문제”라며 “지난 30년간 전국을 돌며 600여 점의 자료를 모은 상태”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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