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첨단산업 굴기’를 꺾겠다는 미국의 야심 찬 계획이 시행 1년도 안 돼 삐걱대고 있다. 대중국 제재의 한 축을 이루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허점을 파고들어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심지어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까지 받는 중국 기업의 사례가 줄줄이 이어지면서다. 미국은 다음 달 중국의 첨단 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 제한을 담은 행정명령을 추진하는 등 견제 수위를 계속해서 높이고 있지만 미국 내부에서조차 대중 규제에 허점이 노출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칠레 산업진흥청은 21일(현지 시간) 중국 최대 전기차·배터리 업체 BYD가 칠레 북부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2억 9000만 달러(3800억 원) 규모의 리튬 배터리용 양극재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칠레 정부는 BYD를 적격 리튬 생산 업체로 지정해 매년 1만 2500톤의 탄산리튬을 우대 가격으로 제공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BYD는 칠레에서 연간 5만 톤의 리튬인산철(LFP) 양극재를 생산할 계획이다.
이로써 BYD는 LFP 배터리 핵심 원료인 탄산리튬의 안정적인 확보가 가능해졌지만 BYD가 칠레를 택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게 외신들의 평가다. 중국 경제 매체인 차이신은 “BYD가 칠레에서 핵심 광물인 리튬을 공급 받아 양극재를 만들고 이를 배터리 제조에 활용해 미국 IRA 규제망을 피하겠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IRA는 전기차 구매의 세액공제 조건으로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채굴·가공한 배터리 핵심 광물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하도록 요구한다. 칠레는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절반 이상이 집중된 남미의 ‘리튬 삼각지대’ 3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과 FTA를 체결해 IRA 규제 조건을 충족한다.
중국 기업이 미국의 규제를 피하는 수법은 날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우회 방식은 기술 제휴다. 미국 완성차 업체 포드는 올 2월 중국 CATL과 미시간주 배터리 합작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하며 이 방식을 활용했다. 포드가 공장 설립 비용 약 35억 달러를 전부 부담하고 지분 100%를 보유하며 CATL은 자본 투입 없이 기술만 제공하고 로열티를 받는다. IRA에 기술 관련 규제는 빠져 있다는 점을 노린 전략이다. 테슬라도 포드와 같은 방식으로 IRA를 우회해 CATL과 미국에 배터리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4대 배터리 업체인 ‘고션 하이테크’는 모호한 국적을 앞세워 IRA 규제를 무력화한 사례다. 중국에 본사를 둔 고션은 독일 폭스바겐이 최대주주라는 점과 스위스 증시에 상장돼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다국적 기업이라고 주장하며 지난해 10월 미시간주에 24억 달러 규모의 배터리 부품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배터리 업체 외에 태양광 장비 업체 룽기그린에너지도 미국 인베너지와의 합작으로 오하이오에 태양광 패널 공장을 짓고 있으며 풍력발전 기업인 밍양스마트에너지 역시 생산·연구 시설 건립을 검토하고 있다. 모두 IRA 법망을 피해 미국 정부의 세액공제 혜택까지 기대하고 있다. 미 경제 매체인 쿼츠는 “중국이 미국 공장 건설, 미 동맹국과의 파트너십 등을 통해 미국의 보조금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며 “IRA의 허점이 글로벌 진출을 노리는 중국 기업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짚었다.
미국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확산하고 있다. IRA로 인해 미국 납세자들의 세금이 중국 기업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대부분이다. 19일(현지 시간) 미국 하원 세입위원회 청문회에서도 “IRA로 가장 큰 수혜를 입는 것은 미국의 근로자가 아니라 중국(미셸 피시바흐 의원)” “IRA는 중국 공산당이 정문을 통해 미국에 매우 손쉽게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다린 라후드 의원)” 등 공화당 소속 하원 의원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중국 기업의 꼼수를 막기 위한 정치권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 부위원장인 마르코 루비오 공화당 의원은 해외 우려 기업과의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도입한 기술로 만들어진 전기차 배터리에 보조금을 주지 않는다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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