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월 중동 순방 중 직접 성사시킨 수십억 달러 규모의 ‘인공지능(AI) 칩 수출 합의’가 미국 내 국가안보 우려에 가로막혔다. 엔비디아의 최첨단 칩이 아랍에미리트(UAE)를 거쳐 중국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다.
1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과 UAE가 해당 합의의 세부 내용을 조율하지 못하고 있으며, UAE 측이 미국의 안보 우려를 반영한 새로운 조건을 수용해야 진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했다.
해당 합의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칩 수십만 개를 UAE에 수출하고, 현지에 대형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내용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중동 테크 동맹’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다. 엔비디아를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등 주요 AI 기업들이 데이터센터 구축과 운영에 참여하며 중동 내 AI 주도권을 선점하려는 전략적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미 상무부와 일부 국가안보 부처는 UAE 현지 기업 G42가 전체 칩 물량의 약 20%를 배정받는 구조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G42는 아부다비에 본사를 둔 AI 전문기업으로, 과거 화웨이와 협력한 전력이 있으며, 향후 중국과 연결될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는 것이 이유다.
상무부는 현재 G42에 대한 직접 공급을 승인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수출에 필요한 라이선스 발급이 보류되면서 프로젝트 전체 일정도 지연되고 있다.
UAE 정부와 기업들은 반발하고 있다. 유세프 알 오타이바 주미 UAE 대사는 성명을 내고 “이 협정은 양국 모두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며 사실상 미국 측 제동에 유감을 표시했다. 협상에 정통한 소식통은 “G42 배제를 아부다비 측은 ‘기존 합의 틀을 깬 행위’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미 정부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백악관 AI 정책을 총괄하는 데이비드 색스 보좌관은 “우리가 공급하지 않으면 중국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며 추진 의지를 강하게 나타냈다. 그는 “칩 유출 우려는 과장됐다”며, “미국 기업의 글로벌 시장 확보가 더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색스는 이 협정의 설계를 주도한 인물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함께 실무 협상도 이끌었다.
실제로 화웨이는 최근 중동 지역에서 자체 AI 칩 판매를 확대하고 있으며, UAE와 사우디아라비아 등에도 공급선을 모색 중이다. 협정이 지체될 경우 중국이 중동 AI 인프라 시장의 틈새를 파고들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도 미국과 유사한 협정을 추진 중이며, 향후 중동 내 ‘미국산 테크 허브’ 구상이 본격화할 수 있을지는 국가안보 당국의 판단에 달려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안은 AI 칩이라는 민감한 전략물자 수출을 둘러싼 미 정부 내부의 이념 충돌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기술 패권과 안보 우선 논리가 중동 외교와 경제 질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현재 국가안보를 이유로 중국 등 일부 국가에 대한 고성능 AI 칩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바이든 시절 도입된 ‘우방국 수출 제한 규정’을 철회했지만, 이를 대체할 새 지침은 아직 마련되지 않아 업계는 정책 불확실성에 대한 불만을 표하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도 최근 트럼프 대통령과의 비공개 면담에서 “수출 지연은 화웨이 같은 경쟁사에 기회를 줄 수 있다”며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성능이 낮은 H20 칩에 한해 중국 수출을 재개하는 방안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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