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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 기자의 그림 이야기] 빈센트 반고흐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작품은 전 세계 유명 전시회에 빠지지 않는 보석 같은 존재다.
특히 미술 애호가들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명이다.

그는 우울증과 간질 등 정신질환에 시달려 급기야는 자신의 귀를 자른다. 물감을 먹고, 등유를 마시는 기이한 행각도 일삼는다. 특히 싸구려 술 압생트에 중독돼 결국 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죽은 후 화려하게 부활한다.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던 생전과 달리 모든 예술가들이 본받아야 할 스승으로까지 칭송받고 있다. 아이러니다.

광기와 우울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태어난 지 150년이 되는 2003년 11월. 뉴욕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장에 박수갈채와 함께 ‘빈센트’를 외치는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2002년부터 급등하기 시작한 고흐의 작품이 이날 다시 고가에 낙찰되면서 축제 분위기가 연출됐다.

낙찰된 작품은 ‘잘리캉의 오솔길(‘L’allee des Alyscamps)’. 사회주의적 공동체에 관심 많았던 그가 프랑스 아를 지방에 머물렀을 때 그린 그림이다.

잘리캉의 오솔길은 ‘해바라기’ 등 고흐하면 떠오르는 대표작은 아니다. 하지만 이날 경매에서 1,050만 달러(약 100억원)라는 고가에 낙찰됐다.

고흐는 생전에 화상(畵商)이었던 동생 테오를 통해 단 한 점의 그림을 팔았을 뿐이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고독과 우울증으로 미치광이 소리를 들으며 살았던 예술가다. 그리고 가난은 그의 숙명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 150여년이 흐른 지금 빈센트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근한 고흐는 경매 시장의 귀하신 몸이 됐다. 20세기 서양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선구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예술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혼

화랑에서 거래하기 좋은 작가는 작품량이 풍부하고 꾸준하게 작업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고흐는 좋은 작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그가 작업에 올인 한 시간은 약 5년 정도로 다른 작가들이 평생 할 일을 몰아서 한 셈이다.

특히 그가 죽기 두 달 전 그린 유화 작품은 무려 70여점으로 하루에 한 점 이상씩 그렸다. 마치 생을 마감할 것을 계획이나 해 둔 듯 그는 거침없이 붓질에 몰입했다.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어떻게 후세에 길이 빛날 천재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됐을까.

이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비운의 삶, 그리고 가난했지만 불꽃같은 열정으로 독특한 ‘고흐’표 화풍을 완성해 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20대 후반부터 10여 년 간의 짧은 기간에 그림을 그렸던 고흐는 불운과 악조건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혼이 담긴 그림을 남겼다.

당시 인상파(Impressionism)가 새로운 경향으로 등장, 너도 나도 따라 하기 바빴던 유럽 미술계와는 달리 고흐는 자신만의 화풍을 일궈냈다.

밀레 등에게 영향을 받아 비르바종 화파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37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성직자ㆍ교사ㆍ화상을 거쳐 화가로 그의 열정을 불사르기까지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고흐는 많은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후세 사람들이 연구하고 싶어 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지만 바로 이 같은 드라마틱한 요소로 인해 미술계는 물론이고 법의학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문가들이 그의 작품과 인생을 연구해오고 있다.

불행한 어린 시절과 실연

고흐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행했던 인생, 그 중에서도 가족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그루스 준데르트라는 네델란드 북쪽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에게 그는 첫 아들이 아니었다. 첫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첫 아들이 태어난 지 1년 후 같은 날 또 한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바로 고흐다.

고흐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하고 그의 이름, 즉 빈센트라는 이름을 그대로 물려줬다.

빈센트는 죽은 형의 이름이자 동시에 새로 태어난 고흐의 이름이기도 했다. 고흐의 생애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평생 동안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애정결핍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고흐는 많은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후세 사람들이 연구하고 싶어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지만 드라마틱한 요소로 인해 미술계는 물론이고 법의학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문가들이 그의 작품과 인생을 연구해오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고흐에게 사랑을 주기보다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무덤을 자주 찾았다. 물론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불행의 첫 단추는 이렇게 꿰어졌다.

고흐의 성장 과정에는 네 명의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나는데, 이들 역시 불행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16살 때 런던 구필 화랑의 점원으로 능력을 인정받던 그는 목사 미망인 로이어 부인의 19살 난 딸을 짝사랑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구혼하는 자리에서 보기 좋게 딱지를 맞는다.

첫 사랑에 실패한 후 그는 생활 태도가 돌변, 고객들과 자주 싸우는 등 화랑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그 후 남편을 잃고 상심에 빠진 백부의 딸 케이를 사랑했지만 역시 실연으로 끝이 났다.

실의에 빠진 고흐는 신흥 도시 헤이그에서 크리스틴 클라시나 호르니크라는 이름의 창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에게 성병이 옮아 고생을 하면서도 한동안 그녀와 함께 지냈다.

이후 그의 마지막 여인으로 기록되는 이웃 섬유공장 주인의 딸 마르호트와 사귀게 되지만 결국 사랑을 얻지 못한 채 이별한다.

성장 과정에서 겪은 이 같은 실연은 그에게 큰 상처로 각인됐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그의 광기를 부채질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예술적인 의욕을 불태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고갱과의 악연

고흐는 화가의 길로 접어든 후에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정규 미술교육은 받은 적이 없었고, 사교성도 부족해 그의 작품을 내세우지 못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실의에 빠져 있을 법하지만 그는 화가들이 함께 모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의한다.

그는 프랑스 아를에 ‘노란 집’을 준비하고 화가들의 동참을 유도했지만 대부분의 화가들은 이를 거절했다. 그의 아이디어에 반쯤 찬성한 화가가 바로 폴 고갱이다.

사실 고갱은 타이티로 여행을 떠나기 전 6개월 정도 머물 생각으로 노란 집에서 고흐와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은 화풍도 다르고 성격도 판이했지만 1년 이상 함께 머물면서 같이 그림을 그렸다. 물론 술도 마시고 사창가도 함께 다녔다.

하지만 고갱은 고흐에게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남긴 인물로 사후에 평가받고 있다. 그를 엽기적인 행동으로 내몰고 결국 자살로까지 몰아갔던 장본인이 바로 고갱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고흐가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른 행동은 당시 지방신문에 날 정도였다.

사실 거만하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고갱과 인간적으로 고독에 찌든 고흐는 같이 살면서 여러모로 부딪쳤다.

사건의 발단은 1888년 12월. 고갱은 서로 숭배하는 화가들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거칠게 싸운다.

외향적이고 활달한 고갱에게는 흔히 있는 말다툼쯤으로 생각됐지만 내성적인 사람들이 그렇듯 고흐에게는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로 가슴에 남는다.

그는 왼쪽 귓볼을 잘라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소중하게 보관해 달라’며 건네준다. 그 후 그린 자화상 두 점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단순 명쾌한 얼굴의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과 재기를 꿈꾸며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얼굴의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이다.

미술계는 그가 고갱의 압도적인 지배를 거부하고 이에서 벗어나려는 용기를 발휘하는 동시에 승리를 과시하려는 무의식이 환청과 환시로 나타나 귀를 자르는 행동으로 옮겼다는 추리를 내놓고 있다.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노리고 귀를 잘랐는데, 결국 그는 ‘미치광이’라는 말 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고흐와 고갱은 동성애자?

둘 사이의 속사정은 고갱이 남긴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갱은 해바라기를 열심히 그리는 고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것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 그림에 등장하는 고흐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술에 취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자세는 차치하고라도 고흐를 화나게 한 것은 손에 들린 붓이 마치 가늘고 긴 바늘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점이다.

“이것이 분명 나라고 그린 것인가? 이것이 나라면 제정신이 아닌 나로군.”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악의적으로 놀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고흐의 유화 600여점 중 43점이 자화상이다. 모델료를 지불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해서라는 분석도 나오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자주 그렸다는 해석도 있다. 특히 그는 초상화를 그릴 때 눈을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고갱은 고흐에게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입힌 인물로 사후에 평가받고 있다. 그를 엽기적인 행동으로 내밀고 결국 자살로까지 몰아갔던 장본인이 바로 고갱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두사람은 특히 동성애적 감정을 갖고 있었던것 아니냐는 분석까지 낳게 하고 있다.

고갱이 술에 취한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은 그에게 모독이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고흐와 고갱을 둘러싼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두 사람과 연관된 그림 중 유명한 의자 그림 두 점이 있다. ‘파이프가 있는 빈센트의 의자’와 ‘폴 고갱의 의자’다.

두 그림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법의학자 문국진 박사는 파이프가 올려진 의자 그림은 고흐 자신의 새로운 생명과 강한 의지가 담겨있고, 촛대와 책을 올려놓은 의자 그림은 번쩍이는 자율적 지성에 의지하는 고갱의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어떤 심리분석학자들은 고흐와 고갱의 동성애적인 감성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고흐가 고갱에게 느꼈던 동성애를 의도적으로 표출했다는 설명이다.

파이프가 있는 빈센트의 의자는 남근을 상징하는 파이프가 담배 한 봉지와 함께 고리버들 의자 위에 놓여있다.

반면 폴 고갱의 의자에는 속을 채운 천 의자 한 가운데 두 권의 책, 그리고 그 사이에 불 켜진 촛불 하나가 발기한 것처럼 서 있다고 한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일 수도 있지만 많은 호사가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대목이다. 허나 두 남자 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두 사람만이 알 일이다.

정신병 증상의 가족력

고흐는 가족력으로 정신병 증상을 타고난 것 같다. 할아버지와 두 숙부가 발작을 일으키는 정신적 질환을 앓은 적이 있었으며, 외가에도 간질병 환자가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누이동생도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고흐가 죽고 난 후 3개월이 흐른 후 동생 테오 역시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형의 곁으로 떠났다. 고흐와 테오는 테오의 아내 요안나의 배려로 프랑스 오베르 쉬즈 우아즈에 나란히 묻힌다.

고흐의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고갱과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의 동생인 테오다. 고갱이 친구이자 경쟁자였다면 테오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후원자이자 그를 유일하게 믿어주는 가족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고흐에게 테오는 삶을 살아가는 의미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가 테오에게 남긴 800여 통의 편지는 고흐의 인생을 유추해 보는 중요한 자료다.

고흐가 자살을 하게 된 원인 중 하나 역시 테오와 관계가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 동안 생활비를 얻어 썼던 테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고흐의 고민도 깊어진다. 즉 더 이상 동생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것.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많은 전문가들의 분석을 요약해 보면 자살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비밀은 그림 속에도 숨겨져 있다. ‘화가는 그림으로 이야기 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의 작품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죽기 전 70여 일 동안 그린 그림에는 실 편백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서구에서 실 편백나무는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오베르의 교회’에 등장하는 갈래 길 중 왼쪽 길은 테오가 가야할 길, 오른쪽은 고흐가 가는 길로 설명한다. 실제 오베르의 교회에 가보면 갈래길이 등장하는 데, 오른쪽은 공동묘지로 가는 길이다. 고흐가 가야 할 길은 죽음이라는 의미다.

또 있다. ‘수확하는 사람’에 등장하는 농부의 손에 들려있는 낫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

사신(死神)이 커다란 낫을 들고 등장한다는 중세부터 내려오는 서구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듯 고흐는 인간이 수확되는 밀과 같다는 뜻에서 수확을 죽음의 의미로 본 것이다.

압생트 중독

가족력으로 인한 우울증이 그를 괴롭힌 병적 요인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싸구려 술 ‘압생트’에 중독돼 후유증에 시달렸다.

19세기 말 파리에서 유행했던 압생트는 알코올 70~80%를 함유한 독주로 에메랄드 빛깔을 띤다.

압생트는 독해서 마시면 환각을 일으킬 정도다. 예술인들은 영감을 주고 감각을 새롭게 해주는 마술적인 힘을 지녔다고 해서 ‘녹색 요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흐의 자화상 중 한 작품을 보면 눈 주위의 부종과 눈동자가 충혈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눈빛도 흐리멍텅하다. 이는 고흐가 압생트를 지나치게 마셨다는 반증이다.

즉 다음날 숙취에 시달리면서 거울 앞의 자기 모습을 그리기 위해 붓을 들었다는 의미다.

의학적인 규명에 따르면 압생트는 트존(thujone)이라는 유해성분이 있어 중독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는 20대 중반부터 환각을 동반한 발작을 여러 차례 일으켰는데, 이는 압생트 중독자가 보이는 것과 유사한 증상이다.

고흐의 자화상 중 한 작품을 보면 눈 주위의 부종과 눈동자가 충혈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눈빛도 흐리멍텅하다. 이는 고흐가 압생트를 지나치게 마셨다는 반증이다.

고갱은 바로 이같은 모습을 그렸다가 고흐의 격분을 불러 일으킨다.

고흐는 압생트를 계속해서 마신 이유에 대해 ‘찬란한 노란 빛깔’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고 말을 했다.

그에게 찬란한 노란빛깔은 무엇일까. 프랑스 아를에서 그림을 그릴 때 그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랑색과 파랑색을 얻기 위해 고심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압생트를 자주 마셨다는 것.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압생트를 마시면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환각증상인 황시증이 나타난다고 의사들은 진단한다.

죽기 전에 그렸던 그림 중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모사한 ‘선한 사마리아인’은 유난히 노란 톤이 강조돼 있다. 작품 속의 노란색은 신의 현존을 상징한다고 미술계서는 분석하고 있다.

아쉬운 죽음

1890년 7월 그림을 그리러 나갔던 고흐가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 그의 주치의였던 가셰 박사는 수술할 필요가 없다며 복부에 난 외상만 치료해 줬다.

이틀을 앓고 난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았다고 이야기 하지만 총기의 출처나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은 채 세상을 등졌다.
문국진 박사는 생전에도 자살 미수를 여러 차례 저질렀던 그는 자살의 위험 인자가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를 갖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어려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상실감과 철들어서는 이성의 사랑에 대한 상실감, 나중에는 화가 공동체에 대한 꿈과 형제간의 사랑에 대한 상실감, 그리고 내성적이면서도 난폭한 성격, 알코올에 의존했던 생활 등을 그 요소로 꼽았다.

문 박사가 내린 고흐의 사망 원인은 급성 범발성 복막염(急性 汎發性 腹膜炎). 복부 총상이 선행적인 사인(死因)으로 작용했지만 제대로 된 외과처치를 받지 못한 채 이틀간 방치돼 장 내용물이 복강에 유출, 복막염을 일으킨 것이 궁극적인 사인이라는 것.

이렇게 고흐는 그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의 주인공이 돼 세상을 비추는 별이 됐다. 그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기이한 행각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만의 독창적인 색과 구도, 그리고 독특한 붓질을 찾기 위한 고독한 여정이었다고…

장선화 서울경제 기자 india@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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