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년 연속 1000억 원이 넘는 국고보조금이 사기꾼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적발 규모만 집계한 것으로 실제 새고 있는 국고보조금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경찰의 판단이다. 법원은 국고보조금 횡령 행위를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사기죄’로 규정하며 처벌에 나서고 있으나 경기 악화 등을 틈타 부정 수급을 유혹하는 브로커들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1일 서울경제신문이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적발한 국고보조금 부정 수급액은 1232억 원에 달했다. 2021년 674억 원에 불과했던 부정 수급액은 다음해 대대적인 전수조사가 이뤄지며 5517억 원으로 크게 늘어난 후 최근 2년 연속 1000억 원대 규모를 보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드러나지 않은 보조금 횡령 사건이 적발된 사례보다 많을 것”이라며 “수사를 통해 밝혀진 부정 수급액은 실제 횡령액보다 적은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사기 수법은 점점 대담해지고 있다. 전남경찰서는 지난달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중소기업 대표 A 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A 씨는 공장을 신·증축 하겠다며 입지 보증금 등 5억 원을 수급한 뒤 공장 부지용 토지를 매매하고 이를 다시 매각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전남 지역에서만 30개 업체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130억 원의 보조금을 부정 수급한 정황이 포착됐다.
국고보조금 사기는 내부 고발도 어려운 구조라 경찰은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검거 인원은 1231명으로 2023년 2112명의 절반에 그쳤다. 경찰 관계자는 “보조금을 관리하는 공무원이 보조금 사후 관리 단계에서 인지하고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하지 않는 이상 실체에 접근하기 쉽지 않다”고 밝혔다. 분야별로 보면 지난해 기준 사회복지 분야에서 가장 많은 533명이 검거됐다. 유형별로는 ‘허위 신청 보조금 편취’가 1086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랏돈으로 산 땅 몰래 팔아먹고, 유령직원 두고 급여 빼돌려
전라남도 지역의 한 중소기업 대표 A 씨는 도내 토지를 매입해 공장을 증축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남도로부터 보조금 5억 원을 받았다. 당연히 도의 허가 없이 매도하거나 양도, 담보 제공이 불가능하다는 단서가 붙었다. 하지만 A 씨는 보조금을 받은 직후 매입한 토지를 그대로 매각했다. 경찰은 A 씨를 5월 검찰에 송치했고 전남도는 A 씨에 민사소송을 제기하며 보조금 5억 원에 대한 회수 절차에 돌입했다. A 씨뿐만이 아니다. 경찰의 이번 수사에 따르면 전남 지역에서만 30개 업체가 130억 원의 보조금을 부정하게 수급한 정황이 발각됐다. 심지어 보조금을 받은 토지를 은행에 담보로 제공해 현금을 융통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지난해 기준 110조 원까지 불어난 국고보조금이 전국 곳곳에서 사기꾼들의 손에 의해 줄줄이 새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시설을 운영하는 명목으로 지급받은 돈을 유용하거나, 위조 서류로 국책 사업에 참여해 보조금을 편취하는 등 수법도 다양하다. 기획재정부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매년 국고보조금 부정 수급을 적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부정 수급 과정에서 공무원들까지 직접 개입한 경우도 적잖아 적발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전남경찰청이 지난달 적발한 대규모 보조금 부정 수급 사례는 그 규모와 과정이 다소 충격적이다. A 씨는 전남도로부터 입지보조금과 시설보조금 등 5억 원을 받은 뒤 공장 부지 명목으로 토지를 매매하고 이를 그대로 매각한 혐의를 받는다. 입지보조금은 지자체에서 관내에 공장을 신축 또는 증축해 고용을 창출하라는 뜻에서 5년간 사업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토지 매매가의 30%를 업체에 주는 지원책이고 시설보조금은 공장 증설에 20억 원 이상 투자한 기업에 투자 금액의 5%를 보전해주는 제도다. 당연히 토지를 업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데 이 단서 조항이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A 씨 사례가 불거지자 전남경찰청은 도내 업체를 대상으로 전수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A 씨를 포함해 무려 30곳에 달하는 업체가 교부 목적에 맞지 않게 금원을 오용하는 등 부정한 방식으로 보조금을 수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개인회사 3곳, 주식회사 27곳이었다. 30개 업체 중 A 씨 업체를 제외하고 26곳은 보조금으로 매입한 토지를 도의 허가 없이 은행에 담보로 맡겨 현금을 확보했다. 3곳은 토지의 소유권 이전이 이뤄졌거나 부동산에 신탁등기·가등기·압류 등이 걸려 있었다. 담보로 제공한 토지는 경매에 넘어갈 경우 회수조차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공장을 지으라고 토지 구매에 보조금을 보탠 지자체가 눈 뜨고 코 베이는 식으로 엉뚱하게 기업의 배를 불린 것이다.
민간 위탁 운영자가 지자체가 운영하는 사업을 마치 개인사업처럼 운영해 국고보조금을 타낸 사례도 있었다. 전남경찰청은 지난해 10월 도내 조성된 마리나의 민간 위탁 운영자 2명을 업무상 횡령 등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들은 관내 학교들과 연계해 생활 스포츠 클럽을 운영한다는 명목으로 받은 보조금을 편취해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구체적으로 해양 레저 스포츠 체험 교실 운영 명목의 국고보조금 2억 600만 원 중 1억 550만 원을 횡령하는 등 총 5억 6000만 원 상당을 유용했다. 지인의 이름을 빌린 ‘유령 강사’를 등록해 지자체로부터 급여를 지원받았는데 이 중 6분의 1은 이름을 빌려준 지인에게 용돈으로 줬고 나머지는 편취했다.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설립된 시민단체들도 나라 곳간을 갉아먹는 범죄를 서슴지 않고 있다. 2월 부산지법은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과 사기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장애인 단체 사무총장과 감사 등 2명에게 징역 4년과 징역 5년 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단체가 위탁받은 해운대해수욕장 파라솔 대여 사업과 활동 지원 급여 제공 사업을 전대받고 개인적으로 운영했다. 또한 시군구에 활동 지원 급여 비용을 청구해 보조금 약 5억 7465만 원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국고보조금을 노린 사기가 판을 치는 가운데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곽준호 법무법인 청 대표변호사는 “부정 수급 사실이 발각될 경우 형사처벌 외에 2~5배의 제재부가금을 부과한다는 사실을 더 강력하게 고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법원은 원칙적으로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로 다뤄지는 국고보조금 유용에 대해 사기죄와의 상상적 경합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 상상적 경합이란 한 개의 행위가 여러 혐의의 구성 요건을 충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보조금을 횡령하는 것이 보조금 관련 법 위반에도 해당하지만 지급 주체인 ‘대한민국’을 기망해 금원을 편취한 사기에도 해당한다는 것이다. 실제 일부 판례에서 법원은 피해자를 대한민국으로 적시하고 사기 혐의를 인정한 바 있다.
“수수료 20% 주면 사업 따내겠다” 브로커 기승
서울에서 8년째 문화 분야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는 김관석(가명) 씨는 최근 몇 년간 국고보조금 사업 선정에서 번번이 탈락했다. 경기 악화로 재정 사정이 어려워진 기업들이 몰리면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진 까닭이다. 쓴맛을 삼키고 또 새로운 지원서를 쓰고 있던 김 씨는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이들은 본인들을 ‘국고보조금 전문 기업’이라고 소개하며 사업을 따낼 테니 보조금의 20%를 수수료로 달라고 제안했다. 업계별로 맞춤형 ‘합격 매뉴얼’을 갖추고 있고 심사위원과도 친분이 있다는 말에 김 씨는 순간 솔깃했지만 양심을 가책을 느껴 결국 고민 끝에 제안을 거절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 지원서를 대신 작성해주거나 허위로 꾸며 국고보조금을 타내는 ‘브로커’들이 판치고 있다. 브로커 업체들은 업계별로 전담팀을 꾸려 지원서, 발표 자료 및 대본은 물론 시장 분석까지 모든 과정을 도맡아준다. 주관처와 심사위원이 선호하는 형태에 맞춰 자료를 준비하기 때문에 이들의 손을 거치면 선정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다는 전언이다.
심사위원과 친분이 있는 브로커라면 몸값은 더 높아진다. 김 씨는 “심사위원을 직접 아는 브로커들은 보통 시세보다 1.5배 정도 비싼 수수료를 요구한다”며 “돈도 현금으로만 받기 때문에 업체 입장에서도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스타트업은 돈 한 푼 한 푼이 아쉽기 때문에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부 브로커들은 아예 지원 자격을 허위로 꾸며내 눈 먼 돈을 타내기도 한다. 부산지법은 이달 22일 사기, 보조금관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국고보조금 브로커 A 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A 씨는 부산 지역 업체들을 상대로 ‘실제 근무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가짜 근로계약서·유급휴직신청서 등을 쓰고 증빙 자료를 제출하면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급해 매출 실적을 만들어주겠다’ 등의 제안을 해 총 3억 원의 국고보조금을 부정하게 받도록 도왔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국고보조금 신청 관련 업무를 하려면 노무사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고등학교 동창들이 운영하는 노무법인의 명의를 빌려 영업한 혐의(공인노무사법 위반)도 받는다.
기술보증기금의 허점을 노려 수십억 원 규모의 대출 사기를 친 브로커 B(37) 씨도 최근 수원지법으로부터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B 씨는 급전이 필요한 저신용자들을 접촉, 이들 명의로 유령 법인을 설립한 뒤 허위 사업계획서를 기술보증기금에 제출해 보증 금액 1억 원 상당의 기술보증서를 발급받았다. 이후 이 보증서를 은행에 제출해 저신용자 명의로 대출을 받게 해줬고, 대가로 수수료를 받았다. 이 같은 수법으로 편취한 대출금은 총 25억 원, 편취한 수수료는 약 6억 원에 달한다. 법원은 “기술보증보금의 공적 자금은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모인 것과 같으므로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 전체에 미친다”며 “피해 규모가 매우 크고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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