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역사 탓인지, 미국만큼 영웅에 집착하는 나라도 없다. 그렇기에 이른바 ‘맨’이 등장하는 영웅 이야기는 유독 미국 창작물의 단골 소재로 자리잡았다. 수퍼맨이 그랬고 스파이더맨이 그랬다. 지난 39년 미국 만화잡지 DC코믹스에 첫 선을 보인 ‘배트맨’은 그 정점이다. 만화로 시작해 지난 66년간 라디오 드라마, 애니메이션, TV 드라마, 게임, 영화 등으로 지치지 않고 새롭게 탄생해 전세계 팬들의 수많은 찬사를 받아왔다. 까만 망토와 가면의 ‘밤의 영웅’ 배트맨이 8년만에 다섯번째 시리즈 ‘배트맨 비긴스’로 23일 한국에서도 부활한다. 제목 그대로 왜 배트맨이 탄생하게 됐는지를 첫 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이른바 ‘프리퀄’ 영화다. 영화는 ‘가면 벗은 배트맨’ 브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담시 최고 갑부 외동아들 브루스 웨인. 그의 부모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온 도시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 그의 부모가 강도의 손에 죽고 아들 웨인은 비밀 조직에 들어가 복수의 칼을 간다. 다시 돌아온 고담시는 절망의 도시가 됐고,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뚫고 배트맨이 돼 고담시 구원에 나선다. 배트맨의 앞장으로 거슬러 올라간 만큼, 그가 배트맨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영화는 그의 인간적 면모로 설명한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말대로 배트맨은 ‘분노와 좌절감을 숨긴 채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이다. 배트맨 특유의 음산한 이미지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선 내 자신이 두려움이 돼야 한다”는 그의 말이 답이다. 어린 시절 가장 두려워했던 박쥐의 가면을 쓰는 이유다. 그런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돈. 초능력을 부여받은 여타 ‘맨’들과 달리 배트맨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으로 무장하고 이상주의자였던 부모의 뒤를 잇는다. 돈이 고담시를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지만, 그 돈이 다시 도시 구원에 나서는 것이다. 새로운 배트맨을 창조했다지만, 여전히 영화의 볼 거리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만의 장기인 스케일. 실제 유럽 아이슬란드의 빙하에서 재현한 히말라야 마을과 신비의 사원을 비롯해 영화 속 폭풍 장면이나 ‘어둠의 도시’ 고담시는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아메리칸 사이코’ ‘머시니스트’의 크리스천 베일은 어둡고 음산한 배트맨 이미지를 멋지게 소화했다. 2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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