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참혹하다. 하지만 첨단기술은 살육을 자행하는 전쟁 참여자까지 그 잔혹함 앞에 냉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해서 수만리 밖 적을 죽이고, 짓이겨진 시신을 모니터로 힐끗 보기만 하면 되는 시대.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는 살아있는 인간의 생을 빼앗는다는 피할 수 없는 죄악감조차 흐릿하게 만들어버리는 현대의 살육전을 비꼬는 영리하고도 치밀한 우화다.
줄거리는 간결하다. 세계 곳곳에서 희생자를 내고 있는 극단주의 테러 집단 알샤바브를 생포 혹은 사살하기 위해 영국-미국-케냐 3개국이 실시간 합동작전을 펼친다. 그들이 맡은 임무와 책임은 철저히 나뉘어 있다. 테러집단이 은거해있는 케냐의 요원들이 초소형 드론 등으로 타깃을 감시하는 영상을 전송하면 영국의 합동사령부가 영상을 확인해 작전을 지휘하고, 하와이 미군 공군기지에 주둔하는 드론 조종사는 사령부의 명령을 받아 타깃을 사살하는 식이다.
지금 이들은 자살 폭탄 테러를 준비하는 타깃을 발견했다. 그리고 50초 안에 이 타깃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한 소녀가 빵을 팔기 위해 타깃의 은거지 근처로 걸어 나온다. 미사일을 쏘면 소녀까지 죽게될 판이다.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도 좋은가.’ 케케묵은 도덕적 딜레마가 다시금 우리 앞에 놓인다.
단조롭게 보이는 스토리는 절대권력이 종언을 고한 현대 민주주의의 상황과 결부되며 예측하기 힘든 결말로 관객들을 끌고 간다. 권력과 책임감이 세밀하게 분화된 현대 정치·행정 체계에서 대부분은 직접 책임질 상황에 맞닥뜨리길 원하지 않는다. 소녀를 희생시키겠다 혹은 그러지 않겠다는 선택은 누구도 내리지 않은 채 작전의 실행 권한은 장군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외무장관에서 수상으로 계속 넘어가기만 한다.
쪼개진 권력과 책임감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마도 작전 이후다. 민간인의 무고한 희생이라는 참상 앞에서 모두 괴로워하는 듯 보이지만 그 죄악감이란 이미 개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작아졌다. 통한의 표정을 지은 장군은 곧 자녀의 선물인 인형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 일말의 찜찜함을 털어버릴 것이고 조용히 눈물 흘렸던 군인 역시 잠시의 휴식 후 임무지로 복귀할 것이다. 남는 것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뿐이다.
영화가 그린 상황은 가상의 미래전이 아니라 이미 자행되고 있는 현대전이라는 점이 섬뜩하다. 이것이 발전한 미래상이고 진화라면 인류와 과학은 더이상 진화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14일 개봉. /김경미기자 km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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