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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경제] 국민연금의 ‘스텔스 노동이사제’…눈치만 보는 기업들

노사, 지난해 12월 합의

임원추천에도 실질 영향

삼성 등 연금 도움 받아

민간기업에 부담 커질 듯





‘노동이사제’ 들어보셨나요? 말 그대로 노동자, 즉 직원이 이사회의 구성원인 이사가 되는 것입니다. 직원이니까 원래 하던 일을 하면서 비상임으로 이사직을 수행하는 것이지요.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공약에서 “공공 부문부터 노동이사제를 도입해 민간기업으로 확산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근로자 대표 1~2명의 경영 참여를 보장해주겠다는 뜻인데요. 금융위원회의 민간 자문기구인 금융행정혁신위원회도 지난 2017년 12월 금융행정혁신보고서를 통해 관련 제도 도입을 권고했습니다.



노사, 도입합의하고도 안 알려

이런 제도를 국민연금도 도입합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한국전력공사 등에 이은 것인데 대형 공공기관인 만큼 파급력이 클 전망입니다. 국민연금 노사는 지난해 12월19일 노동이사제 도입을 위한 노사 실무협의를 진행한다는 내용의 노사합의서를 체결했습니다.

잠시 체결된 노사합의서를 볼까요? 총 5개 항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노사합의서

1. 공단은 복지포인트 지급 등 비연고지 근무자 처우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다.

2. 공단은 임원추천위원회 구성에 있어 노동이사제 도입 등 변화에 따라 직원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3. 공단은 노동이사제 도입을 위한 노사 실무협의를 진행한다.

4. 공단은 PC-OFF제를 2019년 말까지 전요일, 전지사로 확대 완료한다.

5. 공단과 지부는 두루누리상담직(공무직) 임금 등 처우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그렇습니다. 핵심은 2번과 3번입니다. 3번을 보면 연금공단 노사가 노동이사제 도입에 합의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2번은 임원추천 과정에도 직원들의 의사를 적극 반영하겠다는 뜻인데요. 임추위는 이사장과 감사·상임이사·비상임이사를 추천합니다. 지금은 임직원의 의견을 수렴해 구성원을 대표하는 사람을 이사회에 임추위 위원으로 추천할 수 있지만 절차 지연 시 이사회가 대신하도록 돼 있습니다. 정부 안팎에서는 국민연금이 노동이사제를 추진하기로 하면서 다른 공공기관의 움직임도 빨라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통령 100대 국정과제인 만큼 외부에 알릴 법도 한데 국민연금은 본지에 기사가 나오기 전까지 보도자료를 안 냈습니다.





뭐가 문제냐? 노동이사제 기업들 압박요인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연금공단이 노동이사제를 도입하는 게 뭐가 문제냐? “아까 보니 한전이랑 주택도시보증공사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같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냥 공공기관 중에 노동이사제를 하는 곳이 하나 더 생기는 거네” 같은 의문도 떠오릅니다.

그런데 연금공단의 노동이사제는 간단한 게 아닙니다. 국민연금이 어떤 곳입니까. 700조원가량되는 국민노후자금을 굴립니다. 천문학적인 돈을 갖고 있지요(참고로 올해 정부 예산이 470조원입니다). 이 돈으로 뭘 하느냐. 채권을 사고 기업 주식을 매입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요 기업들의 지분을 상당량 보유하고 있습니다.

노동이사제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입니다. 노동이사제를 우리 경제에 도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정부가 쓰는 수법이 ‘공공기관→은행→대기업→중소기업’ 순으로 관련 제도를 도입하게 하는 겁니다. 이명박 정부 때 신입직원의 임금 10%를 줄여 채용을 더 늘리겠다고 한 것도 이 같은 루트를 썼습니다. 청년인턴이나 고졸 사원 채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민간기업의 경영에 직접 왈가왈부할 수 없으므로 공공기관과 정부 말을 잘 들을 수밖에 없는 은행에 먼저 하게 한 뒤, 대기업을 압박하는 것이지요.



지분 5% 이상 보유 업체만 303곳

이런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국민연금 노사가 노동이사제 도입을 하기로 한 것이 왜 의미가 있는지 보입니다. 앞서 연금이 주요 기업의 지분을 갖고 있다고 했죠? 최근 기금운용본부가 공개한 지난해 4·4분기 기준 대량주식보유상황을 보면 국민연금은 삼성전자 10.05%를 비롯해 신세계(13.62%), LG화학(9.74%), LG디스플레이(7.15%), 한화케미칼(7.09%) 등 주요 업체의 지분을 갖고 있습니다. 한전(7.19%)이나 중소기업은행(8.15%) 같은 공공기관 지분도 적지 않은데요. 공시는 지분 5% 기준으로 1%포인트 이상 변화가 있거나 신규로 5% 이상 취득한 곳만 포함돼 실제 지분을 5% 이상 갖고 있는 업체는 더 많습니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303개나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쉽게 말해 이렇습니다. 주요 기업 노동조합이 노동이사제 도입을 요구한다고 칩시다.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실제 KB금융지주 노조는 2017년 11월과 지난해 3월 두번에 걸쳐 노조가 추천한 이사를 사외이사에 선임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지금까지 연금은 한번은 동의해줬고 한번은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연금이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하기 전입니다. 국민연금이 자기네가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겠다고 해놓고 다른 기업에는 하면 안 된다고 하면 말이 안 되겠죠. 거꾸로 국민연금이 투자기업들에 노동이사제 도입을 권유하고 나설 수도 있습니다. 근거가 생긴 것이죠. 국민연금의 노동이사제 도입합의가 합의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실제 기업들은 국민연금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삼성물산 합병 사건 아시죠? 삼성이 국민연금에 매달린 건 결국 국민연금이 갖고 있는 지분의 힘 때문입니다. 주주(국민연금)에 밉보여서 좋을 일은 없다고 봐야지요.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국민연금은 지난해 12월 노동조합과 노동이사제 도입을 합의해 놓고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대비된다.


노동이사제 내로남불? 가능할까?

물론 국민연금은 관련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민간기업 지분을 상당량 갖고 있는 공단이 스스로 노동이사제를 하겠다고 했다는 것은 최소한 다른 기업 주주총회 안건에서 노동이사제가 올라오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박이 나오기도 합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국민연금은 수익을 위해 지분을 산 것이니 노동이사제가 기업가치를 훼손하면 반대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지요. 이론상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게 일반 투자자라면 그럴 수 있지만 국민연금 같은 공공기관도 가능할까요? 국민연금이 높은 수익만 내면 된다며 전범 기업이나 비도덕적 업체에 투자하면 지탄을 받습니다. 자기네는 허용하면서 다른 기업은 안 된다고 하면(혹은 주총에서 반대표를 던지면) 노동계의 큰 반발을 불러올 것입니다. 2017년 11월 김성주 국민연금 이사장은 노동이사제를 두고 “노동자는 식구라고 이야기하면서 정보 공유하는 데는 왜 식구가 아니어야 하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다른 기업에는 반대한다? 법개정 전 노사의 도입 합의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이유입니다.

한편으로는 걱정입니다. 우리나라의 실정에 노동이사제가 맞는지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인데요. 근로자의 의사가 이사회와 경영에 전달돼야 하는 것은 100%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꼭 노동이사제여야 하는지는 고민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국민연금의 노동이사제 도입합의가 아쉬운 부분입니다.
/세종=김영필기자 susop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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