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사태’ 이후 사법부 개혁을 최우선으로 내건 대법원이 ‘변호인에 의한 판사 평가’를 사실상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갈수록 추락하는 상황에서 사법부의 개혁 의지가 퇴색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4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대법원은 지난달 26일 사법 개혁을 위한 첫 자문기구인 ‘제1차 사법행정자문회의’를 열어 각종 안건을 논의했다. 사법행정자문회의는 지난해 말 법원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국회에 제출한 사법개혁안에 포함된 사법행정회의와 유사한 임시조직이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각 위원이 사법개혁을 위한 주요 안건에 대해 의견을 개진했지만 위원장인 김명수 대법원장은 “당장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애초 사법행정자문회의가 김 대법원장의 거수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우려가 맞아떨어졌다는 지적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재판에 참여한 변호인이 해당 재판을 진행한 법관을 평가한 결과를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제도다. 이찬희 위원(대한변호사협회장)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법관 평가를 위해 변호인이 법관을 평가한 점수를 법관 인사에 반영해야 한다”며 법관평가 제도의 내실화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이에 위원장인 김 대법원장은 “취지에는 공감하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어 법원행정처로부터 기초적인 보고를 받은 다음에 논의를 이어가겠다”며 사실상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현재 법관평가 제도는 대한변협 소속 지방변호사회가 매년 실시하는 게 전부다. 지난 2008년 도입 이후 각 지방변회별로 다른 평가 양식을 사용하다 2017년부터 변협에서 마련한 단일기준을 쓰고 있다. 총점수는 100점 만점이며 평가점수에 따라 상위법관과 하위법관을 선정한 뒤 소속 법원장과 해당 법관에게 통보한다. 하지만 법원이 단순 참고자료로 활용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판사평가 제도에 대한 법원의 소극적인 태도는 판사 징계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5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법원 방청객으로 출석한 60대 대학 교수에게 “주제넘은 짓”이라고 말한 판사에 대해 재발 방지와 주의 조치를 권고했다. 이른바 ‘막말 판사’ 징계를 공식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법정에서 법관의 언행은 재판의 범주에 포함된다”며 이를 거부해 논란을 낳았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법부 개혁에 대한 일선 판사들의 저항이 잇따르면서 법관평가 제도를 둘러싼 논의는 제자리”라며 “사법부가 진정한 개혁 의지를 가졌다면 법관 평가를 다원화해 국민의 신뢰를 받는 사법부를 만드는 게 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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