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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어린이 디자인인가' 디자이너 오준식이 묻다

[디자인의 재발견]

'어른의 눈으로 본 어린이 디자인'서 탈피

화려한 장식, 자극적인 색감, 수많은 캐릭터 대신

아이의 신체에 적합하게 조정된 맞춤형 가구와

'절제된 디자인'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 담아

키즈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슈슈앤쎄씨’ 리브랜딩

왼쪽이 5살 동생 슈슈, 오른쪽이 10살 언니 쎄씨다. 광교 엘리웨이 매장을 찾은 어린이들은 너나 할것 없이 둘 사이에서 사진을 찍는다.




슈슈앤쎄씨 리브랜딩이 적용된 광교 앨리웨이 매장.


없다, 눈길을 끄는 자극적인 색감도 형형색색 장난감도. 있다, 어린이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고안된 가구와 눈높이를 고려한 진열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까지.

디자이너 오준식에게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이란 절제다. 그는 키즈카페, 놀이터, 어린이집 등 기존 공간 대부분이 ‘어린이’라는 사용자의 특수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고 판단했다. 그림, 장식, 색상, 캐릭터는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면서 정작 비례가 조정된 가구, 흥미를 유발하는 즐길 거리는 부족한 데 주목한 것. 그는 최근 키즈 브랜드 ‘슈슈앤쎄씨’의 리브랜딩을 맡으며 이 같은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전 찾은 알바 알토(Alvar Aalto) 뮤지엄 입구에 일렬로 붙어있던 손잡이 세 개를 떠올리며 깨달았다. ‘애들은 이렇게 귀엽고 화려한 걸 좋아할거야’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디자인은 결국 ‘어른이 규정한 어린이 디자인’일 뿐이라는 걸.

오준식은 현대카드, 아모레퍼시픽, 중앙일보 브랜드·디자인 총괄을 역임했다. 화려한 ‘디자인 인생 1막’을 지나 그는 한국적 가치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사명감으로 2막을 열었다. 디자인 스튜디오 베리준오(VJO)와 VERY 레스토랑 대표로 활약 중인 오준식을 만리동 사옥에서 만났다.

현대카드, 아모레퍼시픽 등 대기업 디자인 총괄을 역임한 오준식 디자이너. 지금 그는 베리준오와 레스토랑 베리의 대표를 맡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기존의 디자인들이 ‘지나치다’고 했다. 어떤 의미인가.

△‘슈슈앤쎄씨’의 리브랜딩을 맡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핀란드 디자이너 알바 알토 뮤지엄에 간 10년 전 기억이다. 입구에서 안내해주시는 분이 들어가는 문을 가지고 설명을 한참 했다. 모듈 세 개가 달린 문 손잡이 디자인이었다. 어린이나 노약자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열 수 있게 하기 위한 거란다. 그때만 해도 왜 이런 데 시간을 많이 쓸까 하며 넘어갔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디자인 작업에 착수하면서 신기하게도 이 기억이 가장 먼저 스쳤다. 어린이를 위한 곳이라면서 정작 들어가는 입구에 접근의 용이성을 고려한 부분은 찾기 힘들다. 그 사실을 느끼고 나니 놀이터, 어린이집, 어린이 버스 등에 지나치게 많은 장식과 자극적인 색상이 사용된 게 보였다. ‘이게 왜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이지?’, ‘어른의 눈으로 규정한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교 ‘슈슈앤쎄씨’ 내부의 키즈 스파존. 내부의 모든 가구가 어린이들의 비례와 눈높이를 고려해 맞춤 설계됐다.


-오준식이 풀어낸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이 궁금해진다.

△일단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적합하게 조정된 비례다. 아이의 신체비율을 고려해야 한다. 화려한 색을 여러 개 쓸 필요도 없다. 오히려 눈에 자극을 주지 않는 색감을 더 편안해한다. 한 마디로 ‘절제된 디자인’이다. 디스플레이 디자인도 바꿨다. 진열대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췄다. 여기에 아이와 함께 오는 어른들을 위해 모듈형 진열대를 준비했다. 기본 진열대 위에 모듈 가구를 다양하게 조합해 쌓는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다. 기본형 진열대가 긴 테이블 형태이기 때문에 위를 다 비우면 아이들이 모여 파티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도 가능하다. 이 같은 개선점이 반영된 리브랜딩은 최근 광교 엘리웨이에 오픈한 2호점부터 적용됐다.

-아이들이 쓰는 제품이라고 다 장난감 같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생각해보자. 장난감이 아닌 모든 제품이 왜 다 장난감 같아야 하나. 아이는 그 제품의 사용자다. 사용자라는 관점에서 신뢰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드는 게 본질 아닌가. 아이가 쓴다는 말은 온 가족이 쓸 수 있다는 것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그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되는 디자인에 초점을 맞췄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쎄씨, 생일파티하는 슈슈 등 한쪽 벽면 전체가 슈슈와 쎄씨의 사진첩이 됐다. 캐릭터를 제외한 가족과 친구 모두 사람이다. 이곳을 찾는 어린이들이 캐릭터를 진짜 친구처럼 느껴지도록 한 세심한 디테일이다.


-클라이언트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전혀. 얘기하다 보니 내가 정말 운이 좋은 편이다(웃음).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얘기를 참 많이 나눴는데 그런 부분이 브랜드 스토리를 정립하는데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슈슈앤쎄씨라는 브랜드명에 맞춰 슈슈는 5살 동생으로, 쎄씨는 10살 언니인 자매로 설정했다. 언니를 동경하는 슈슈가 쎄씨 언니를 흘끗 쳐다보는 것도 자기애가 강한 쎄씨는 도도한 표정을 짓는 그런 디테일 모두 박경미 대표가 쌓아온 경험을 나누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야기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아이들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다는데.

△아이에게 손을 씻어라 라고 명령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법’ 중에 하나가 손을 씻는 것이라고 이해시킨다면 어떨까. 외출하고 돌아오면 스스로 손을 씻으러 가지 않을까. 슈슈코스메틱의 박경미 대표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다듬고, 우리가 디자인으로 녹여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내년 1월 오픈을 목표로 준비 중인 새 매장부터 리뉴얼된 제품을 만날 수 있다.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는 디자인적 판단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여기서 생기는 고민은 없나.

△가치관의 차이다. 안토니오 치테리오 (Antonio Citterio)처럼 나 역시 모든 프로젝트를 할 때 그 브랜드의 소울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카드, 아모레퍼시픽 등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2016년 개인 아틀리에인 베리준오(VJO)를 론칭했다.

△갑작스런 결정은 전혀 아니다. 오래전부터 해온 이야기인데, 인생에서 용기 그래프가 정점을 찍는 순간이 50살이라고 생각했다. 과감함을 잃는 지점이 50살이라면 그 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다짐했다. 47살에 베리준오를 시작했다. ‘50살이 된 지금 하라면 가능할까?’라고 스스로 물으면 쉽게 그렇다는 얘기가 안 나온다. 결과적으로 47살에 사업을 시작하게 된 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클라이언트로 47살에 창업한 코스맥스의 이경수 회장을 만나게 된 것 역시 그 ‘운명론’에 힘을 싣는다(웃음). 베리준오를 시작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첫 파트너로 이경수 회장을 만나 ‘저분께 배우고 싶다, 배워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으니 말이다. 멘토를 만난 기분이었다.

만리재로에 위치한 VERY 레스토랑 1호점 ‘베리스트릿키친’.


-베리준오 이전에 레스토랑 사업을 시작했다. 의외의 조합이다.

△그런가? 이번에도 전혀 아니다(웃음). 소프트 인더스트리 중에 가장 성장 가능성이 큰 게 뷰티와 푸드라고 생각해왔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 산업은 거의 방치 수준이라고 본다. 가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 분야인데 경험이 없다 보니 그래 내가 직접 실험할 수 있는 주방을 가져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1년에 70%가 망한다는 평을 들었는데 다행히 망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두번째 VERY 레스토랑인 ‘베리부산’을 오픈한다.

베리 스트릿 키친에 이어 론칭 준비중인 베리부산 로고. 태극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이르면 연내 오픈 예정이다.


-왜 베리 ‘부산’인가.

△한국음식문화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가 부산이다. 베리부산의 로고도 태극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많은 문화가 혼합된 부산은 한국의 LA, 맨체스터 같다. 해변도 있고 첨단기술도 있고 그런 섹시함이 있다. 부산은 낮과 밤의 이미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베리 레스토랑 1호인 ‘베리 스트릿 키친’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부산은 길거리 음식의 천국이고 베리스트릿키친의 스트릿 역시 대중음식이자 길거리 음식을 의미한다.

-‘한국적 가치 알리기’에 관심이 많다. 한국적 가치란 뭐라고 생각하나.

△내가 어렸을 때는 외국 걸 갖고 와서 한국에 되파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 문화분야 수출은 적고 수입만 많을까 라는 문제의식은 그때부터 생겼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인데도 파리, 뉴욕을 붙이기도 하고 그런 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일본의 디자이너 대부분은 도쿄나 오사카에 살면서도 세계무대에서 활동한다. 본인의 문화를 기반으로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환경을 부러워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선배세대가 된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용기를 잃기 전에 나이 먹기 전에 첫발은 떼놓아야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미약하나마 기반을 다져야 그런 가치를 믿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합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사실 ‘한국적 가치’를 정의 내릴 수 있나. 그 누구도 정의 내리지 못한다. 그저 한복과 지붕의 선 등 유형적인 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한국적 가치’를 알려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제약이 많다. ‘이건 일본적인 것 같아, 이건 한국 게 아니야’ 모두가 쉽게 비평한다.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를 만든다. 프랑스 건축가도 일본 디자이너도 한국에 방문했다가 좋다고 생각하면 가져다 쓰는데, 그러면 우리는 또 이렇게 말한다. ‘왜 우리 걸 가져다 쓰지?’ 그들은 왜 자유롭고 우리는 왜 자유롭지 못할까. 나 역시 ‘한국적 가치’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 선배세대가 답하지 못한 한국적 가치란 무엇인지, 그건 또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형태에 국한하는 걸 벗어나서 말이다.

-‘서울로’에 이어 ‘손기정·남승룡 기념관’ 건립이라는 공공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렇다. 안타까운 점은 3년을 공들여 준비했던 손기정·남승룡 기념관 건립사업은 멈추게 됐다는 사실이다. 자기 꿈에 한 발짝 다가간 남승룡 선수를 비운의 마라토너로 규정하는 게 이해되질 않아서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1등만 기억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는 지금의 청년들에게도 큰 울림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준비하던 프로젝트였는데 손기정 공원 안에 추가 콘텐츠를 만드는 건 손기정 재단에서 반대했다. 그래서 이번엔 순천시로 갔다. 남승룡 선생의 고향인 순천에서라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순천시에서 프레젠테이션한 게 딱 1년 전인데 피드백이 없다. 쓰라렸지만, 올 8월에 힘에 부쳐 내려놓겠다고 이야기했다.

남승룡 선생이 주는 지금의 밀레니얼 세대에 주는 메시지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관심이 있는 기업이 있다면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 함께 하고 싶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세계신기록으로 당당히 골인한 서윤복 선생의 조력자가 남승룡 선생이다. 남 선생이 페이스메이커로 같이 달렸다. 이런 인연을 보스턴시가 알고 있을까? 역사적 유산을 높게 평가하는 미국의 특성상 새로운 형태의 문화 파동이 생겨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순천시와 보스턴이 협약해 남승룡 마라톤대회 1·2·3등에게 보스턴 마라톤대회 출전자격을 준다면? 그런 상상.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사진제공=베리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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