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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한계로 '비극 원인' 못밝혀...정치 성향 잣대 돼버린 '세월호'

[최형섭의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29> 배-세월호 침몰

기술·사회적 시스템 갖춘 선박

예기치 못한 '세월호 사고'에

"기계 결함에 바닷물 유입 침몰"

"외부 충격 가능성 배제 못한다"

내인설 vs 외력설 '해석의 충돌'

되레 '진영' 갈라놓는 기준으로

세월호를 실은 반잠수식 선박 화이트마린호가 지난 2017년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목포신항에 접안하고 있다. /서울경제DB




어린 시절 음료수를 마시고 남은 페트병을 목욕할 때 가지고 들어간 일이 있었다. 플라스틱 소재의 병 안에 물이 들어가고 나갈 때 몇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빈 페트병을 물속에 넣으면 ‘꼴꼴꼴’ 소리가 나며 좁은 입구를 통해 물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병은 물이 다 채워지기 전까지는 수면 위에 떠 있으려 한다. 그러다가 물이 가득 차면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게 된다. 비어 있는 병이 떠 있을 수 있는 것은 부력(浮力) 때문이다. 특정한 물체의 밀도에 따라 물 위에 떠 있을 수도, 가라앉을 수도 있다. 밀도가 비교적 낮아 물 위에 뜨는 물체는 자연상태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나아가 내부에 빈 공간을 갖도록 설계하면 물보다 밀도가 높은 무거운 소재라도 물 위에 떠 있게 만들 수 있다.

인류는 이러한 원리를 활용해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배로 강을 건너거나 육지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서 어로 활동을 했을 것이다. 더 먼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부력의 원리만으로는 부족했다. 우선 험한 파도에도 견딜 튼튼한 선박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서도 방향을 확인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 역시 중요했다. 나아가 변덕스럽게 변하는 바람을 동력원으로 삼아 원하는 방향으로 효과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돛이 개발됐다. 이렇게 발달한 항해술을 이용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탐험가들은 유럽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또는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이른바 ‘발견의 시대’의 시작이었다.

일반적으로 배는 고립된 공간으로 인식된다. 일단 부두에서 출항하게 되면 육지와의 연결이 끊어진 독립된 ‘영토’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배는 현대적 통신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육지와 끊임없이 교신을 주고받는다. 특히 300~500톤 이상의 배는 선박자동식별시스템(AIS) 설치가 의무화돼 있다. AIS는 선내에 설치된 위성항법장치(GPS), 자이로컴퍼스 등에서 만들어진 항해 정보를 수합한 후 초단파(VHF) 해상 통신망을 통해 운항 속도에 따라 2~10초 간격으로 무선 송출한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은 모두 자신의 위치·속도·방향 등의 정보를 주기적으로 발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발신된 신호는 가까운 해상교통관제센터(VTS)로 모인다. 한국의 경우 해안선을 따라 20개소의 VTS를 운영하고 있다. 각 VTS에서 수합된 정보는 최종적으로 해양수산부에서 관리하는 전국 통합망 서버에 저장된다. 이렇게 보면 현대의 선박은 더 이상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 복잡한 기술적·사회적 시스템의 일부가 됐다.

이렇게 촘촘해 보이는 테크놀로지의 관리망이 예기치 않은 사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지난 2014년 4월에 발생한 해난 사고로부터 얻을 수 있다.

2014년 4월15일 오후9시께 청해진해운 소속의 여객·화물 겸용선 ‘세월’호가 인천항 부두로부터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청해진해운이 이 배를 구입한 것은 2013년의 일이었다. 세월호는 원래 1994년 일본 나가사키의 하야시카네 조선소에서 건조돼 마루에이페리사 소속의 ‘나미노우에’호라는 이름으로 가고시마와 오키나와 사이를 왕복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임무를 마치고 중고시장에 나온 배를 청해진해운이 구입해 인천과 제주를 왕복하는 페리선으로 운용했다. 훗날 알려진 일이지만 청해진해운은 마루에이로부터 선박을 구매한 후 선미 객실부에 한 층을 증축하는 등 몇 가지 개조 작업을 벌였다. 세월호는 한국 연안에서 운항을 시작한 후 1년 넘게 큰 탈 없이 수백 명의 승객과 자동차·화물을 실어 날랐다.

4월15일 밤에 출항한 세월호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항해를 시작한 지 12시간이 채 되지 않았던 4월16일 오전8시49분 무렵 세월호는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배는 회전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우현 쪽으로 기울었고 기울어진 쪽의 통풍구와 배수구 등을 통해 바닷물이 배 내부로 유입됐다. 유입된 바닷물은 항해 중에 열려 있던 수밀문(水密門)들을 통해 선박의 하단부로 밀려들었다. 그 결과 급격한 우선회가 시작된 지 불과 20~30분 안에 객실부는 침수됐고 100분 정도 후에는 130도 가까이 배 전체가 완전히 뒤집어지기 직전의 상태에 도달했다. 선수부만 수면 위에 남은 세월호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세월호는 사고 당일 출항하면서부터 선박안전법에 정해진 바에 따라 주기적으로 AIS 신호를 송출했다. 세월호가 송출한 AIS 정보는 배의 위치에 따라 7개 VTS에 5만928개의 흔적을 남겼다. 이 정도 위치정보만 있으면 당일 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정보통신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믿고 있는 만큼 정밀하지 않았다. 정보 송출 시점의 기상환경에 따라 데이터가 누락될 수 있다. 통신용량을 초과하는 정보가 밀려들면 데이터 충돌에 따른 오류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GPS의 위치정보도 경우에 따라 오차가 발생하기도 한다. 더구나 세월호는 정상적으로 운항하지 못하고 짧은 시간 내 급격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은 더욱 컸다. AIS 정보를 바탕으로 선박의 항적도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객관적’인 실재를 보여주기만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이용해 재구성한다는 어느 정도의 해석을 필요로 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테크놀로지의 관리망을 아무리 촘촘하게 구성하더라도 논란의 소지를 완벽하게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상충되는 해석의 충돌이 발생했을 때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은 없다는 말인가. 이럴 때일수록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100% 확실한 상황에서만 발언할 수 있다면 좋은 전문가라고 말하기 어렵다. 불확실성이 개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수준의 정보를 교차 검증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가 전문가를 우대할 이유는 무엇인가.

세월호 문제에 대해 한국 사회의 전문가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세월호 침몰 원인 조사는 사고 후 3년이 지난 2017년 4월에 설치된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선조위는 세월호 선체 인양으로 새로 확보된 증거를 바탕으로 침몰 당시의 상황을 상당한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복원했다. 하지만 6인의 선조위 위원들은 수많은 데이터에도 불구하고 합의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채 두 권으로 나뉜 종합보고서를 제출했다.

‘내인설’로 알려진 의견을 가진 위원들은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를 지나면서 발생한 기계 결함으로 인해 급속하게 우선회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더 빠른 속도로 배가 기울었고 열려 있던 수밀문을 통해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침몰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었다. 반면 ‘열린안’으로 알려진 의견을 피력한 위원들은 내인설의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며 외력 등 다른 요인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18년 8월에 발간된 선조위 보고서는 전문가들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을 때 어떤 영향이 있을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세월호를 바라보는 관점이 그 사람의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는 잣대로 기능하게 됐다. 이제 전문가들의 발언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합리적 사고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해득실에 따라 혹세무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도 할 말이 없다. 이러한 세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건전한 공동체라면 세월호 침몰로 사망한 304명의 승객들, 그리고 그들의 유가족들에게 어떻게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010년대의 한국 사회는 기어코 세월호를 정치적 성향을 측정하는 잣대로 만들어내고 말았다. /서울과기대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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