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계와 법조계에서 차등의결권과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 도입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정부가 ‘기업규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추진으로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공격에 길을 열어주면서 정작 우리 기업에는 방어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외 투기자본의 대기업 경영권 공격
해외 투기자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영권 방어가 취약한 국내 기업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소버린의 SK 지배구조 개선, 이사 교체 요구(2003년) △칼 아이컨의 KT&G 우호 사외이사 선임 요구(2005년) △엘리엇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반대(2015년) △엘리엇의 현대차·모비스 합병·고배당 요구(2018년) 등이 대표적이다.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감사위원 분리선임, 대주주 3%룰 강화, 다중대표소송제 등이 잇따라 도입된다면 해외 투기자본은 물 만난 고기처럼 국내 기업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우려된다. 반면 우리 기업들은 ‘도마 위 생선’ 신세가 돼 규제족쇄에 묶여 투기자본의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경영권 공격과 방어의 균형이 심각하게 무너지는 것이다. 기업들 사이에서는 “상대편은 칼춤을 추고 있는데 우리는 막대기로 싸운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심지어 몇 차례 대기업의 경영권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자사주 처분마저 규제하겠다는 주장이 여권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경영권 위협 노출은 갈수록 커지는데 방어할 수단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하나씩 없애는 꼴이다.
당정, 우리 기업 방어권 제공 안해
차등의결권은 말 그대로 복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지난 20대 국회 때 윤상직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했지만 ‘오너 일가에 좋은 일’이라는 논리에 막혀 폐기됐다. 21대 국회 들어 같은 당 추경호 의원이 “정부의 상법 개정에 대응해야 한다”며 재차 발의했다. 해외 투기자본의 국내 기업 공격이 잦아지는 상황에서 제도 도입의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크다. 더욱이 이번 상법 개정안이 대주주의 의결권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한하면서 최소한의 보완조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영권 방어수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올해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대상을 대기업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대주주 의결권을 억압한다. 이것도 문제지만 기업이 이에 대응할 수단이 없다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급기야 대한상공회의소는 투기 펀드 등이 주주제안을 통해 이사회에 진출하려고 시도할 경우만이라도 대주주 의결권 3%룰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기업 법무팀의 한 관계자는 “최상의 방어권은 잘못된 제도 자체를 도입하지 않는 것”이라며 “감사위원 선출 3%룰은 전 세계 어디에도 입법 사례가 없다”고 말했다.
투기자본 카르텔 부추기는 3%룰
대주주 의결권 3%룰은 경영권에 대한 침해 요소가 많다. 투기자본이 카르텔을 형성해 경영권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게 된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시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것이 상법상 규정된 ‘1주 1의결권’을 원칙적으로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상법 369조는 ‘의결권은 1주마다 1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김선정 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차등의결권이 ‘1주 1의결권’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논리라면 대주주가 확보해놓은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것 역시 1주 1의결권 원칙에 위배되기는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문위원실은 이미 지난 6월 의결권 3%룰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위원회는 “주주가 이사 선임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주주가 지배권을 실현하는 가장 핵심적 방법”이라며 “이를 제한하는 것은 이런 핵심권리를 제한하는 것이어서 재산권의 일종인 주주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사를 겸하는 감사위원은 회사의 의사결정 기관인 이사회를 구성하는 이사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재계의 우려와 일맥상통하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자사주 처분까지 손대나
그나마 경영권 공격을 방어하는 데 쓰였던 자사주 수단마저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삼성은 엘리엇의 경영권 공격을 받았던 2015년 자사주를 KCC에 매각해 우호세력으로 삼았다. 의결권 없는 자사주를 제3자에 매각하면 의결권이 살아난다는 점을 활용한 것이다. 결국 KCC가 우호세력으로 등장하며 경영권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당에서는 자사주 처분을 이사회 결의가 아닌 주총 통과사항으로 법을 고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과거 여권에서 꾸준히 제기된 사안이지만 거대 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사주 규제까지 이뤄지면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수단이 또 하나 사라지는 셈”이라고 우려했다.
/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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